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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거니 Jun 01. 2017

이방인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이방인'은 프랑스의 작가 알베르 카뮈가 1942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노벨상 수상작가인 카뮈는 프란츠 카프카, 생택 쥐페리 등과 함께 실존주의 작가로 유명하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로 소설은 시작한다. 어머니의 죽음이 요양원으로부터 날라왔지만 엄마의 나이도 잘 모르는 주인공 뫼르소는 담담하다. 올 것이 왔구나 하는 그런 마음도 아니다. 그저 담담할 뿐이다. 오늘이든 어제이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렇다고 뫼르소가 엄마를 미워하거나 싫어했던 것도 아니다. 한동안 뫼르소는 엄마를 모시고 살았다. 직장을 다니는 뫼르소가 함께 살기 힘들어져 요양원으로 모신 것이다.


요양원에서 거행되는 장례식에 가기 위해 뫼르소는 검은 양복을 차려 입고 집을 나섰다. 요양원에서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날씨가 더웠다. 뫼르소는 눈물을 흘리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무덤덤할 뿐이었다. 엄마의 요양원 친구들을 만났을 때도 할 말이 없었다.


주인공 뫼르소는 가식적인 것을 거부한다. 뫼르소는 누구나 쓰고 있는 가면(페르조나)을 쓰지 않고 산다. 그는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자신의 감정을 은폐하지 않는다. 이러한 뫼르소를 잘 이해할 수 있는 광경이 있다. 엄마장례식을 치른 다음날 뫼르소는 해수욕장에 갔다. 예전에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했던 마리를 만나, 둘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마리는 내(뫼르소)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이미 한 번 말했던 것처럼,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아마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왜 나하고 결혼을 해요?" 하고 마리는 말했다. 나는, 그런 건 아무 중요성도 없는 것이지만 정 원한다면 결혼을 해도 좋다고 설명을 했다. 게다가 결혼을 요구한 것은 그녀 쪽이고, 나는 그저 승낙을 했을 뿐이다. 그러자 마리는, 결혼이란 것은 중대한 일이라고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나는 "아니야." 하고 대답했다. 그녀는 잠시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프랑스 식민지인 알제리에는 프랑스인과 현지 아랍인이 함께 살고 있다. 주인공 뫼르소는 해변에서 아랍인을 총으로 쏘아 죽인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약간의 긴장관계는 있었지만 서로를 죽일 만큼의 원한은 없었다. 왜 총을 쏘았냐는 판사의 질문에 뫼르소는 뜨거운 태양 때문에 눈이 부셔서 쐈다고 답한다. 긴 재판과정에서 배심원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뫼르소가 자신의 어머니 장례식에서 무덤덤하고 지루해 했다는 것에 큰 관심을 보이고 그것이 뫼르소가 이 사회에 더 이상 살아 있을 가치가 없다는 판결을 내린다.  뫼르소는 결국 사형선고를 받는다.


알베르 카뮈는 미국판 서문에서 이 소설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고 하였다.


소위 국가에 충성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과 같은 사상이나 관습은 집단적 무의식에 존재한다. 자연과 폭력의 무서움에 떨고 사람들은 기적을 바란다. 기적을 만드는 신의 존재를 믿는 것 역시 집단적 무의식이다. 뫼르소 같은 사람은 이러한 집단적 무의식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 사람이다. 마치 외계에서 온 이방인 같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실존주의가 생겨났다. 신을 부정하고 과학은 인정한다. 과학은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는 모든 현상을 설명하려고 한다. 이러한 과학을 기반으로 이 사회를 개선시킬 수 있는 장치나 방법을 고안하는 것을 우리는 공학이라고 부른다. 과학을 하고 공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믿기 어렵다.  자연과학이나 공학은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당연히 기적을 믿지 않는다. 물리로 대표되는 자연과학은 인간의 호기심에서 시작되었다. 철저한 종교사회에서 시작된 과학은 새로운 종교가 되었다. "신은 죽었다."고 주장하지만 절대적인 신의 위상에 버금가는 진리가 과학이다. 끝없는 논쟁과 증명 속에 이루어진 현대의 과학문명은 하나의 종교혁명이다.


신의 존재가 부정되고 문제가 생겼다. 그렇다면 인간의 존재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실존주의에서 우리 인간은 던져진 존재라고 설명한다. 순전히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어떤 목적이나 어떤 용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불안정한 상태로 부조리한 세상에 던져진 인간은 자유를 얻어내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존재이유를 찾아야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신을 대체한 과학과 공학은 결코 인간의 존재이유 따위엔 관심이 없다. 결국 우리는 인문학에서 답을 찾을 수 밖에 없다.


끝이 없을 것 같던 과학과 공학의 발전은 21세기가 되면서 정체되고 있다. 과학과 공학만으로 더 이상의 사회적 발전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융합'이 이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 인문학과의 융합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존재이유를 찾기 위해 과학자나 엔지니어도 문학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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