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장군의 열두척의 배의 가치를 알다.
이번 노르웨이 여행은 시작부터 조짐이 안좋다.
만15주 학기 종강과 함께 떠나려고 부지런히 기말고사 답안지 채점하고 성적입력할 준비도 마쳤는데, 이번 학기부터 성적입력시스템이 바뀐단다. 그런데 아직 개발이 덜 되었단다. 예전엔 기말고사 주간에 성적입력이 가능했다. 교수의 학기는 종강 후 시험보고 채점하고 성적입력까지 해야 끝난다. 어쨌든 성적입력을 위해 노르웨이까지 노트북을 갖고가야할 상황이 되어버렸다. 다행인 것은 이번 노르웨이여행은 배낭여행이 아니고 자동차여행인 것이다.
모바일 첵인은 어제 이미 했으니 짐만 부치면 된다. 공항에 일찍 도착하니 아직 카운터는 안 열었고 짐 부치는 기계만 있다. 카운터는 출발 3시간 전에 보통 연다. 처음보는 기계들이 카운터 반 이상을 점령하고 있다. 자꾸 시스템이 바뀐다. 결국 카운터 인력을 줄이기 위한 것이다. 이제 겨우 모바일 첵인에 익숙해졌는데 부치는 짐 직접 무게 달고 수화물표까지 직접 붙이란다. 자꾸 바뀌니 적응이 힘들다. 애매모호한 상황이 싫은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보딩패스의 QR code 읽히고, 여권까지 읽히고 나니 수화물표가 뱀처럼 길게 나온다. 투명한 아크릴 도어가 열리고 부치는 짐을 저울에 올렸다. 내 비행기표의 무료로 부칠 수 있는 짐 무게는 23키로이다. 그런데 눈금이 26.5 이다. 노트북 가방을 배낭에 넣어 핸드캐리에 여유가 많이 없어진 때문이다. 직원을 찾으라는 안내가 뜬다. 정말 매정한 기계다. 카운터를 열 준비를 하던 젊은 여인이 내게 오더니 3키로를 빼서 핸드캐리 하란다. 아니면 100불을 추가 지불해야 한단다. 가방 하나 더 부치는 값이 100불인 것 같은데...
이민가방을 뒤엎을 생각을 하니 아득하다. 아직 시간은 많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장애인 화장실로 카트채 밀고 들어가 가방을 완전히 다시 쌌다. 작고 무거운 것들은 전부 바닥에 있기 때문이다. 돋보기까지 쓰고 각 물품의 중량을 확인하여 정확하게 3키로를 뺐다. 200그람짜리 볶음김치 통조림 6개와 180그람짜리 햇반 10개를 핸드캐리 가방과 배낭으로 간신히 구겨 넣었다.
다시 짐 부치는 기계와 씨름하여 이번에는 한번에 마쳤다. 마음에 여유가 생겨, 아까 쌀쌀맞게 굴던 젊은 여인에게 물었다. 기계가 정확하게 얼마까지 허용해 주냐고...
23.9 키로까지 기계가 허용한다.
애매모호한 상황을 어렵게 벗어나 3키로가 늘어난 핸드캐리 가방과 배낭을 메고 검색대로 향했다. 예기치 못한 참사는 거기서 발생했다. 200그람짜리 볶음김치통조림이 문제였다. 갖고 못탄단다. 다시 나가서 부치는 짐에 넣던지 자기네가 폐기(?) 하겠단다. 13일의 여행을 위해 처음에 13개의 볶음김치통조림을 준비했다. 집에서 짐을 싸던 중 5개를 포기했다. 그런데 지금 눈 앞에서 6개가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암담했다.
처참했다.
나 자신이 너무 불쌍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PriorityPass 카드로 라운지 소파에 주저 앉았다. 이민가방을 화장실에서 다시 뒤엎어 몸도 피곤하지만 볶음김치통조림을 빼앗긴 마음의 상처가 너무 커서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단 두개의 볶음김치 통조림을 갖고 노르웨이를 13일 여행할 생각에 내가 너무 불쌍해졌다. 여행을 떠날 때 김치통조림을 챙긴 것은 지난 겨울부터다. 전에는 여행을 다니며 음식때문에 힘들어 하지 않았다. 한국사람들이 많이 가는 여행지에서 한국음식점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래서 힘들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하루 한끼는 찰진 밥이 먹고 싶다. 최소한 한식이나 초밥이...
라운지에서 마음의 안정을 다스리고 나니 문득 옛 기억이 났다. 유명 브랜드의 김치가 면세점에 진열되어 있던... 난 김치없이 밥 못 먹는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 육순의 나이가 되도록 공항에서 김치를 사본 적이 없다. 그냥 지나쳐 보았을 뿐이다.
바닥이 투명하여 내용물인 김치가 보인다. 80그램 봉지 10개가 튼튼한 지퍼백에 포장되어 있다. 면세점 직원에게 환승하는 경우에도 문제없는지를 재차 확인했다. 한묶음의 싱싱한 김치를 샀다. 10봉지의 김치의 가치가 이순신 장군에게 남은 열두척의 배만큼이나 커 보인다.
볶음김치 통조림 6개를 잃었을 때 그렇게 우울하더니 생김치 10봉지를 얻고나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볶음김치는 쉽게 질린다. 생김치의 익숙하고 편안함을 따라올 수 없다.
새옹지마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