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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거니 Jul 11. 2018

‘수의’를 언제 준비해야 하나...

가장 좋아하는 옷으로 정하다.

교수 연구실에 있던 크리스탈 패를 전부 버렸다. 근속패, 공로패, 감사패 등이 열개는 족히 되는 것 같다. 복도청소하시는 아줌마한테 이 크리스탈 재활용되냐고 물어보니, 안된단다. 할 수 없이 큰 쓰레기통에 몽땅 쓸어 넣었다. 속이 시원하다. 저것들을 언제 버리나 한동안 고민했었다.

학교 행정일을 보직을 받아 하다보면 책상 위에 놓는 명패를 학생 등록금으로 만들어 준다. 소위 자개 박고 검은 옻칠을 한 그럴듯해보이는, 그렇지만 아주 연한 갈색의 사무용 책상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이름이 크게 쓰여 있는 명패가 연구실 구석에 몇 개가 쳐박혀 있다. 이번 여행 끝나고 돌아가면 그 명패들도 모두 버려야겠다.  

사람이 죽어 염습할 때 시신에 입히는 옷을 ‘수의’라고 한다. 내가 알기로는 수의는 고급삼베로 한다. 대부분의 망자들이 자신의 수의를 준비하지 않고 사망하기에 장례식장에서 음식 고르듯이 상주가 보통 선택한다.

삼베로 수의를 하는 것은 일제식민지시대에 생긴 풍습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갖고 있는 옷 중에 가장 좋은 옷을 수의로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고, 실제 오래된 무덤에서 비단옷들이 주로 나온단다.

어느 소설인지 모르겠지만 읽은 기억이 생생하다. 아주 연로하신 어머니가 본인의 수의를 장만하고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을 자세히 묘사한 부분이 있었다. 수의를 장만하신 어머니는 돌아 가시기 전까지 하루도 빠짐 없이 수의를 꺼내 펼쳐보고 다시 접기를 반복하셨다.

그렇다면 언제가 수의를 장만할 적기일까?

평생 한번도 입어보지 않은 삼베옷을 장만하고 싶지 않다. 아무리 고급 삼베라도 삼베는 삼베의 촉감이 있다. 내가 중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의 여름교복은 테도롱인가 뭔가하는 합성섬유로 만들었다. 너무 질겨서 결코 해지지 않는다. 나는 목 주위에 닿는 그 합성섬유의 촉감이 너무 싫었다. 학교가기 싫었던 이유 중에 여름 교복의 촉감도 한 몫 했다. 선풍기조차 없던 교실이 너무 더우면, 하복 상의를 벗고 흰 러닝셔츠 차림으로 수업 듣는 것을 허락하는 선생님이 좋았다. 특히 땀이라도 나면 여름 교복의 촉감은 내겐 너무나 끔찍한 고통이었다. 고등학교 때 소위 교련(군사 관련 교육훈련)이 있는 날은 교복대신 교련복을 입고 등교를 했다. 난 교련복이 너무 좋았다. 합성섬유가 아닌 순면의 촉감때문이었다.

수의를 정했다.

내가 가장 좋아해서 가장 즐겨입는 옷으로 정했다. 몇년 전에 딸과 함께 네팔여행 때 포카라에서 산 순면의 네팔 바지와 20년 쯤 전에 카트만두에서 산 순면의 자켓으로 정했다. 지금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에어비앤비 숙소에서도 입고 있다. 이보다 더 편하고 좋은 옷이 없다.

여행을 떠나 좋은 경치를 보며 맥주나 와인을 마시면, 이렇게 좋은 날이 내일도 모레도 계속될 것이란 환상에 빠져든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시 지금과 같은 상황을 내 의지로 만들 수 있다는 착각 말이다. 오늘은 결코 다시 오지 않기에 지금을 최대한 즐기며 미래를 조금씩 준비해야 한다. 함께 화장할 수의와 관 같은 것을 말이다. 화장을 하는데 관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

어쨌든 수의를 정하고 나니, 지금의 행복이 더 확실히 느껴진다.

스위스 인터라켄 부근 Brienz 호숫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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