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의 노동은 피해야 한다.
일을 해야 노인이 행복할 수 있다는 우리 사회의 통념은 과연 진실일까?
가장 확실한 노후대비는 은퇴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은퇴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래 일한 직장에서 규정대로 정년퇴직했으면 새로운 직장을 찾아 계속 더 일하라고 한다. 새로운 직장을 못 찾으면 직업을 바꿔서라도 계속 노동을 하라는 것이다. 자의건 타의건 은퇴하는 순간, 자본주의에서 더 이상 돈을 벌지 않는다면 존재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짐만 되는 것이란다.
공적연금이 일상을 살기에 부족하고 개인연금을 준비할 만큼 충분한 소득을 올리지 못한 대부분의 은퇴 준비생들은 생각이 많다. 생존이 두렵고 엄청 떨어진 존재 가치때문에 굴욕적인 모멸감을 더 견뎌야 할지도 모른다. 생존의 두려움 때문에 계속 일을 해야 한다면 노예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인도의 간디가 그렇게 위대해진 것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교육받고, 변호사가 되었으나 백인들의 인종차별에서 느낀 모멸감을 참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안락과 쾌락을 포기하고 남루한 옷을 걸치고 물레를 돌려 실을 뽑으며 자존감을 지켜냈기 때문이다. 우왕좌왕하는 인도인들에게 ‘인도인은 노예가 아니다’는 자존감을 불어줬기 때문이다.
법륜스님의 유튜브 강연을 보면, 모든 걱정, 불안, 스트레스 및 분노는 자신의 욕심에서 나온단다. 마음의 평정을 얻고 싶으면 욕심을 버리면 된단다. 마음을 비우지 못하기에 채워지지 않는 욕구 때문에 온갖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것이란다. 노후에 대한 불안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 아닐까?
대체 얼마가 있어야 노후가 불안하지 않겠는가?
노후가 불안하여 노후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대비할 여유도 없다. 매일매일 허덕이고 있을 뿐이다.
직장과 직업 모두에서 자의적으로 은퇴한다는 것은 더 이상 노동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욕심도 버리고 체면치레니 사람 구실이니 하는 남의 시선도 버려야 진정한 은퇴도 할 수 있다. 내가 제대로 못 키운 자식들이 걱정이라면 관계를 끊어야 은퇴가 가능하다.
마지막 남은 한자리의 비행기 좌석은 아주 비싸게 팔 수도 있지만, 채워지지 않을 한자리의 비행기 좌석은 아무리 똥값이라도 아무도 사지 않는다.
얼마 남지 않은 내 인생의 시간은 희소성으로 비싼 가치를 가질 수도 있지만, 하고 싶은 것 없는 인생의 시간은 아무도 그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
하고 싶은 것 없는 노후라면 노동이라도 하는 것이 낫다.
사람은 두 번 죽는다. 자신의 인생을 정의하던 직장과 직업이 사라졌을 때 사회적 죽음이 온다. 그리고 자신의 육체가 더 이상 삶을 지탱하기를 거부할 때 육체적 죽음이 온다.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직장과 직업은 계속 줄어들고, 수명은 전례 없이 연장되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회적 죽음과 육체적 죽음 사이의 길고 긴 ‘노후’ 다.
결국 노후대비는 얼마의 돈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죽음 이후 하고 싶은 것을 구체적으로 찾는 것이다. 돈과 상관없이 하고 싶은 것이 있어야 노후가 의미 있는 시간이고 제법 비싼 가치를 유지할 수 있다. 은퇴 전에도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면 노후에도 하고 싶은 것이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을 해야 노인이 행복할 수 있다는 우리 사회의 통념은 진실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잘못된 교육의 결과다. 노후의 노동은 피해야 한다. 얼마가 남은 노후인지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