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혼자 여행하는 이유
어제는 이라와디 강가의 River view hotel까지 30분을 걸었다. 당연히 구글맵의 최단거리를 걷다 보니 주변 상황이 점점 안 좋아졌다. 중간의 버스터미널을 지나자 제법 넓은 쪽방촌 같은 지역을 통과하고 쓰레기로 뒤덮인 작은 호수를 지났다. 냄새 고약한 쓰레기 더미 옆에서 쪽방촌 아이들이 모여 앉아 놀고 있다. 하수도 시설이 제대로 없는 듯 질펀한 지역에서는 빨래하는 사람들과 널린 빨래들이 마음을 심란하게 한다. 관광객이 당연히 다니지 않는 길이라 호객꾼 같은 사람도 없었다.
River view hotel 은 위치도 좋고 7층의 Sky bar의 전망도 좋았다. 질긴 돼지고기 찹스틱과 맥주로 점심을 했다. 돼지고기가 이렇게 질긴 것으로 보아 이 돼지는 뛰어놀던 돼지였나 보다 했다. 넓게 흐르는 이라와디강을 많은 배들이 오르내린다. 강가 제방 밑에는 또 다른 빈민가가 늘어서 있다. 미국의 대도시 슬럼가를 차로 지나치면 위험한 곳이란 느낌이 드는데 미얀마는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사람들이 나의 존재에 관심이 없다. 눈길을 주지 않는다.
강가에 많은 배들이 묶여 있다. 유람선 같기도 하고 강을 건너는 여객선 같기도 하다. 낚싯배도 있다. 누런 강에서 고기도 많이 잡히는 듯 비린내 심한 어시장도 근처에 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은 대로를 택했다. 역시 오토바이 택시 타라고 성화들이다. 점심에 마신 맥주가 신장을 지나 방광에 차기 시작하여 몇 번 탈까도 생각했지만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기 전에 써야 하는 헬멧이 끔찍하여 포기했다. 수 천명은 썼을 헬멧에 머리숱 없는 내 머리를 댄다는 것은 소름 끼치는 일이다. 결국 경보 경기하듯 호텔로 돌아와 방까지도 가지 못하고 로비 화장실에 내 업보를 한가득 쏴 댔다. 육체적 평정을 되찾고 나니 모레 아침 바간(미얀마 최대 관광지)으로의 교통편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한국말하던 아가씨가 프런트에 없다는 것이 아쉽다. 만달레이에서 바간 가는 미니버스는 워낙 많아서 내가 시간만 정하면 된단다. 버스가 호텔까지 와서 픽업하고 바간에 내가 묵을 호텔에 떨궈준단다.(픽업은 제 때 했으나 드롭은 바간 입구의 버스터미널에 해줬다. 바간지역 3일 입장권 25,000짯도 강매당하다시피 하고 4킬로 안 되는 호텔을 5,000짯 주고 택시 탔다.) 단돈 10,000 짯(원화로는 7,500원)에, 시간은 네댓 시간 소요. 미얀마만의 독특한 관광인프라다.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고 누워 10시 방향으로 고개를 살짝 돌리면 큰 창문을 통해 만달레이 언덕이 잘 보인다. 업그레이드된 이 방의 제일 좋은 점은 전망이다. 어젯밤에는 언덕 위 사원과 파고다가 조명을 최대로 한 듯 근사하게 보였다. 맨 발로 많은 계단을 걸어야 하는, 일몰 시간대에는 너무 관광객이 몰려 자리 잡을 곳이 없을 정도라는 언덕에 잠깐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혼자 여행하는 것은 어릴 적 내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과정이란 생각이 든다. 1972년 7월이니 만 13살에 어머니가 신부전으로 돌아가시고(요새는 신장투석이 일상화되어 10년 넘게 투석하는 사람도 많고 신장이식 수술도 흔하지만 그땐 신장투석기가 명동 성모병원에 한 대 뿐이었단다) 바로 10월부터 시작된 새어머니와의 생활은 끔찍했다. 물론 육체적으로 학대당하진 않았으니 다행일까? 그 생활은 1981년 대학을 졸업하고 홍릉의 한국과학기술원 기숙사에 들어가면서 일단 끝난 듯했다. 드디어 출가한 것이다. 어머니가 죽었다는 것을 충분히 애도하지 못한 것이 트라우마가 아니고 도저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과 한 집에서 가족으로 묶여 10년 가까이 살아내야 했다는 것이 트라우마다.
이즈음 이혼하는 부부들이 주변에 많다. 이혼하는 이유야 다 합당하겠지만 이혼이 당사자들의 잘못된 선택에 대해 본인들이 책임을 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사이에서 고통받는 아이들의 트라우마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
내 트라우마는 또 있다. 국민학교 일 년은 정말 길었다. 끔찍하게 길었다. 사립학교였지만 한 반이 거의 60명에 가까웠던 것 같다. 성숙하지 못한 담임선생이라도 만나면 그 일 년은 너무 길게 느껴졌다.
어느 아줌마 둘째 딸이 초등학교 3학년 때 개학이 싫다며, “엄마는 좋겠다. 엄마는 직장동료가 매년 바뀌지 않잖아.”라는 말을 했단다. 자신은 1년마다 선생님도 바뀌고 친구들도 바뀌어서 적응하는 것이 힘들다 했단다. 이 아이도 나와 같은 트라우마가 있을 것을 생각하니 안쓰럽다. 동병상련인가.
중고등학교는 더 끔찍했다. 폭력적인 일상에서 불합리함을 제기하면 더 심한 폭력이 내게 부과된다. 그나마 공부라도 잘해서 그 폭력을 덜 당했다고 자위한다. 만약 그 폭력적이고 야만인 선생들을 지금 이 나이에 다시 만난다면 아마 나는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따귀를 날리거나 발차기를 하여 내 상처를 치유하려 들 것 같다.
이런 끔찍한 12년의 교육과정은 자본주의에서 인간의 노동을 당연하게 체화시키는 과정이라고 한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등교하고 50분 똑바로 앉아 있는 노동을 하고 10분 쉬는 것을 하루 종일 반복하면서 인간이란 동물이 사회에 나와 평생 하게 될 노동의 리듬을 익히는 과정이라고. 폭력적이고 불합리한 선생들은 우리가 모든 조직에서 경험하는 직장 상사들과 마찬가지다. 그런 상사들 밑에서 우리는 각자도생 하며 경쟁하고, 가끔 함께 불만을 나누기도 한다.
누가 그랬다. “세상을 살아가며 사람과 부대낀다는 것이 마치 맨 몸으로 갈대밭을 지나가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나는 가끔 혼자 있고 싶다. 그래서 혼자 여행한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상처들을 혀로 핥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