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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거니 Oct 09. 2020

불편한 진실 4

할아버지 페미니스트


외손자가 18개월이다. 아직 말을 제대로 못 해 할아버지를 '하브' 할머니를 '할'이라 부른다. 가까이 살기에 자주 본다. 애엄마가 일도 하기에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애를 맡아야 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엄마 아빠 다음으로 자주 보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엄청 따른다. 벌써 유튜브로 '핑크퐁' 보는 것을 엄청 좋아한다. 그래서 엄마 아빠는 집에 TV를 치웠다. 할아버지를 보면 TV를 틀어 달라고 조른다. 아니면 할아버지 스마트폰을 들고 와 유튜브 보여 달란다.


할아버지는 양육에 책임이 없다.


그래서 손자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준다. 유튜브에서 고릴라 동영상을 찾다가 영화 '킹콩'의 동영상 클립을 우연히 함께 보았다. 킹콩이 공룡과 싸우는 장면이었다. 킹콩이 여자 주인공을 보호하면서 공룡과 싸우는 장면은 정말 처절하였다.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본 그 영상이 어린 손자의 머리에 각인되었다. 태어나서 본 가장 강렬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나도 쇼킹했으니까...


딸을 가져보지 못한 아버지는 결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


딸이 있기에 그리고 그 딸이 엄마가 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기에 그 고단함(끝없는 아기 돌봄 노동)을 알기에 난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남녀평등사회를 부르짖는 이유는 남녀가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가부장적 사회다. 남자가 해야 하는 일이 있고 여자가 해야 하는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일의 성격에 따라 누가 할 것이냐가 구분 지어진다면 아직 남녀가 평등한 사회가 아니다. 특히 가족을 돌보는 노동은 주로 여자에게 지워진다. 아기를 돌보거나 연로하신 부모를 돌보는 일을 노동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돌봄은 아주 힘든 노동이다. 특히 잠시도 쉬지 않는 유아를 돌보거나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부모를 돌보는 것은 정말 고단한 노동이다.


이렇게 가족을 돌보는 노동은 대부분 무급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급이란 노동이 아니거나 취미여야 한다.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 말이다. 외손자가 너무 이쁘지만 내게 돌봄은 세 시간이 최대다. 3시간이 지나면 내 체력과 정신력이 방전된다. 딸이 읽는 책을 나는 즐겨 읽는다. 거기에 불편한 진실이 있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엄마도 일하면서 아이를 낳아 키우려면 친정부모를 착취해야 한다.'


창세기 (?) 이후 인류는 가부장적 사회를 유지하고 있다.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중학교 세계사 시간에 배운 그러나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 깨달은)을 보면 귀족, 평민, 노예 계급이 있고 다시 남자, 여자, 아이의 차별이 있다. 귀족이라도 여성은 아버지나 남편의 소유물에 지나지 않는다. 평민 여성이나 여성 노예는 오죽했을까? 그 잘난 미국에서도 여자의 선거권은 1920년이 되어서야 주어졌고 사우디아라비아는 2015년에 여성의 선거 참여를 허용했다.


페미니스트란 여성의 눈으로 사회를 보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면 '알랭 드 보통'이라면 모를까 나 같은 한국 할아버지는 결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 뼛속 골수까지 가부장이었으니...


그러나 난 페미니스트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줄도 모르고 엄마가 됐다'란 책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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