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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거니 Jan 20. 2022

할아버지 누구한테 혼났어?

다음 달 만 세돌이 되는 외손자 도민이는 DNA를 나와 1/4을 공유한다. 도민이 엄마 지민이와는 1/2을 공유한다. 도민이를 볼 때마다 지민이 어릴 적 모습을 본다. 어쩌면 내 어릴 적 모습을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몸을 조금도 가만있지 못하고 끊임없이 움직인다. 심리상담가인 아내는 가끔 "도민이가 ADHD는 아니겠지." 하며 걱정한다. 공룡 장난감을 이리저리 배열하여 공룡시대를 만들고 있다. 이즈음 공룡에 꽂힌 도민이는 수많은 공룡 이름을 외우고 각양각색의 공룡들을 구별할 줄 안다. 예전에는 이렇게 공룡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았는데 아무도 보지 못한 공룡들의 종류가 이렇게 다양해진 것은 그동안 많은 공룡 화석들이 끊임없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려니 한다. 암기력 좋은 도민이는 말도 정말 깜찍하게 한다. 새로운 단어를 들으면 그 뜻을 묻는다. 뜻을 알게 된 단어는 금세 제대로 사용한다. 엊그제 "할아버지 꿈은 뭐야?"( https://brunch.co.kr/@jkyoon/396 )라고 물은 것도 할아버지의 꿈이 궁금해서라기 보다는 도민이 자신의 꿈을 말함으로써 그 전날 배운 꿈이란 단어를 사용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도민이와 대화를 하는 것이 재미있다.


엄청 추운 날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니 거실에서 도민이가 혼자 놀고 있었다. 공룡시대를 꾸미느라 할아버지의 등장에 전혀 반응하지 않고 온갖 공룡들을 줄 세워 배치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도민이 엄마 지민이는 식탁에서 아내와 대화 중이다. 거실 소파에 외투를 벗으며 내가 혼자 중얼거렸다.

"어흐, 추워서 혼났네."

도민이가 휙 하고 나를 돌아보면서 정말 진지한 표정으로,

"할아버지 누구한테 혼났어?"

허걱. 어찌 설명할지 모르겠다.


혼자 놀면서도 어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다. 어려운 단어가 있으면 나름대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신기한 단어는 예외 없이 묻는다. 그리고 어른들의 대화에 자기도 끼고 싶어 한다. 도민이 엄마 지민이가 그랬다. 오죽했으면 지민이의 어릴 적 별명이 '꼭 껴! 다 껴!'였을까. 성가실 정도로, 귀찮을 정도로 물어대고 끼어드는 지민이를 키우느라 아내는 힘들어했다. 상대를 안 해주면 찡찡거리기 시작한다.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며 결국 찡찡거림은 아내의 큰 소리로 울음으로 번진다. 심지어 아내는 그런 악담도 했다. "이다음에 너 같이 엄마 힘들게 하는 애 낳아서 그대로 당해봐라"


내가 어르신이 되도록 기억하고 있는 사건이 있다. 내가 도민이 보다는 커서 대여섯 살 정도라고 생각된다. TV 드라마를 보는 나이였다. 그 당시 드라마에 자궁암이 나왔다. 주인공 엄마가 자궁암이라고 했다. 자궁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가족들을 보며 자궁암이란 것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사실 그 당시 암이라면 예외 없이 곧 죽는 병이었다.


저녁에 아버지가 퇴근하고 어머니와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었다. 내게는 5촌 당숙이 되는 아버지의 사촌형님이 큰 병에 걸린 것 같았다. 무거운 분위기로 보아 암인 듯했다. 며칠 후 아버지의 조카(내게는 사촌 형)가 집에 왔다. 아버지보다 겨우 여섯 살 적기에 내게는 작은 아버지 같은 형님이다. 사촌 형과 아버지의 대화 중에 나는 아마도 옆에서 장난감 갖고 놀고 있었다. 대화가 당숙의 병환으로 옮겨가는 찰나에 내가 참지 못하고 껴들고 말았다.


"자궁암 이래."


결국 아버지한테 엄청 혼나고 그 이후론 어른들의 대화 주변에 어른거리지 못하게 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집에서 대화를 일본어로 하기 시작했다. 나는 모든 집에서 어른들은 우리 집처럼 일본어로 대화하는 줄 알았다. 모든 아버지 어머니는 일본어를 잘하는 줄 알았다.


누구한테 혼났냐는 도민이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도민이 한테도 자궁암 사건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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