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차 타세요?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1859년)을 발간하여 자연선택이란 개념을 세상에 처음 소개하였다. 인간이 침팬지와 유사한 영장류 조상으로부터 진화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어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적자(The fittest) 생존이란 용어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설명되어 우리는 이 용어에 익숙하다. 생존에 가장 적합한 종이 계속 후손을 남겨 진화한다는 것이다. 진화의 방향은 생존이 유리한 쪽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다윈은 수컷 공작새의 화려한 깃털이나 엘크 수컷의 무겁고 거대한 뿔과 같이 자연선택이 설명해 주지 못하는 특성들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래서 1871년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이라는 책에서 성 선택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였다. 공작새의 꼬리나 엘크의 거대한 뿔은 번식 경쟁에서 암컷들의 선택을 받아 진화했다는 것이다.
암컷들이 왜 생존에 불리한 긴 꼬리와 거대한 뿔을 가진 수컷을 선택하는가는 이스라엘 동물생태학자인 아모츠 자하비가 핸디캡 이론이란 것으로 설명했다. 그런 거추장스러운 장식품을 달고도 살아남았다는 것은 다른 자질이 특별히 뛰어나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꼬리와 뿔과 같은 핸디캡이 자신의 우월성을 암컷에게 납득시켜 계속 진화한다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진화하여 수렵채집 사회에서 농경사회로 발전하면서 신분과 계급이 생겨났다. 귀족, 평민, 노예가 생긴 것이다. 예전에는 신분이나 계급을 가장 쉽게 나타내는 것은 의복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과학과 공학의 발달은 많은 풍요를 가져왔다. 30년 전쯤 해외로 여행 가기가 엄청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그 당시 업무로 해외여행을 해야 하는 비즈니스맨들을 위한 책이 있었다. 100회 이상의 해외업무 출장을 한 저자의 경험을 정리했다. 그 내용 중에 아직도 기억하는 것은 '비행기를 타러 공항 갈 때 넥타이를 맨 정장을 입고 가라'는 것이다. 장시간 좁은 비행기 좌석에서 버티기 위해 편한 복장이 필요하다. 비행기에 탑승한 뒤에 편한 옷으로 갈아입을지언정 공항에서는 꼭 정장을 착용하라는 것이다. 좌석배정을 해주는 첵인카운터(그 당시는 미리 좌석배정을 할 수 없었다.)에서 부터 대우가 달라진다고. 가능한 좋은 자리배정과 재수 좋으면 무료 좌석 업그레이드도 받을 수 있다며. 출입국 심사와 세관 통과 시에도 대우받는다며. 결국 옷이 날개라 정장이 신분이고 계급이란 얘기였다.
만인이 평등한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무슨 신분과 계급이 있냐고 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결국 자본이 신분이고 계급이 되었다.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것은 세습되는 신분이고 계급이다. 기회의 평등과 공정이 중요하다고 부르짖는 것은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보화 사회를 거치며 격식이 많이 파괴되었다. 정장은 직장 면접이나 결혼식 같은 중요한 예식 때나 입는 옷이 되었고, 정치인이나 대기업 임원들만이 입는 옷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사회는 잉여사회(Surplus society)다. 옷이나 신발 같은 의복뿐 아니라 모든 것이 넘쳐나는 사회다. 이렇게 넘쳐나는 물건들이 지구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자동차는 잉여가 아니다. 다른 물건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싼 내구재다. 신발 사듯이 살 수 없고, 운동화 버리듯이 버릴 수 없다. 자동차가 지금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분이나 계급을 나타낸다.
국가에서 업무용 차량을 제공하는 장관 같은 고급공무원에 대해 온갖 예우에서 차이를 둔다. 제공되는 자동차의 배기량과 등급이 고급공무원의 계급이다. 자본주의를 지탱하고 있는 회사들에서도 임원의 계급에 따라 회사에서 제공하는 자동차에 차이를 둔다. 결국 자동차가 옛날의 의복처럼 신분이나 계급을 드러낸다.
젊은 수컷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한다. 월급이 어느 정도 쌓이고 나면 생애 첫 차를 고민한다. 언제 어떤 자동차를 장만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이 끝나면서 생애 첫 차를 장만하고 큰 기쁨을 누린다. 드디어 내 차를 갖게 되었다고, 나도 드디어 차를 가진 신분이 되었다고. 자동차로 인한 이동의 자유를 만끽하며 그렇게 자동차와 인연을 시작한다. 공작새의 꼬리를 얻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 들어 은퇴하는 어르신들은 고민이 많다. 고민들 중에는 생애 마지막 차에 대한 것도 있다. 국가나 회사에서 제공하던 자동차가 없어지고 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다. 현대 사회에서 자신의 자동차 없이 산다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나처럼 운전하는 것 자체를 즐기는 사람은 자동차가 있어야 하지만, 운전 자체가 스트레스인 어르신도 많고, 제법 비싼 내구재인 자동차와 그 운용 비용이 부담스러울 경우 생각이 많아진다. 노후 재산은 한정되어 있는데 얼마나 살다 갈지 아무도 모른다. 요양원 신세를 질지도 모르고 그 기간도 얼마나 오래갈지 모른다는 것이 정답 없는 문제를 만든다.
한국에서 자신이 성공(?)했다고 생각하면 벤츠의 S클래스를 타야 한다. 최소 1억 오천부터 시작이다. 프리미엄 브랜드인 BMW의 7 시리즈와 아우디의 A8이 비슷한 가격대를 형성하지만 벤츠와 경쟁이 되지 않는다. 독일의 다이믈러와 벤츠가 각각 최초의 자동차를 발명했다고 하니 가장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브랜드임에 틀림없다. 많은 신기술들을 자동차에 적용하여 잘 달리고, 튼튼하고, 심지어 사고 나도 안전하고, 그리고 유난히 비싸다. 벤츠 판매량 세계 순위는 중국, 미국, 독일, 영국, 한국이다. 한국 시장이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벤츠가 많이 팔리는 시장이다. S클래스만 놓고 보면 한국이 세 번째란다. 14억 인구의 중국과 미국 다음이란다. 오천만이 조금 넘는 대단한 나라임에 틀림없다. 초기 비용과 유지 비용을 생각하면 벤츠 S클래스를 탄다는 것은 일종의 핸디캡이다. 다윈의 성선택 이론이나 자하비의 핸디캡 이론이 한국인의 벤츠 사랑을 설명할 수 있을까?
1899년 시카고 대학 교수였던 베블런이 얘기한 '베블런 효과'란 것이 있다. 비쌀수록 사람들은 가치가 높다고 생각하여 오히려 비싼 물건이 더 잘 팔리는 현상을 뜻한다. 소위 명품이라 하는 것들에 사람들은 특별한 가치를 부여한다. 자동차 브랜드 중에서는 벤츠가 명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페라리니 람보르기니 같은 슈퍼카도 물론 명품 대접받지만 일상적으로 타고 다닐 수 있는 차는 아니다. 벤츠와는 다른 영역에 존재하는 명품이다.
친한 선배가 있다. 작년 봄에 65세 교수 정년퇴직을 하고, 가을에 암 판정을 받았다. 암은 아주 초기라 수술만 받으면 별 문제없을 것으로 주변 사람들 모두 생각했지만, 본인은 암에 걸렸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수술 예정일을 기다리며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 통장 잔고를 끌어 모아 2억 하는 벤츠 S클래스를 덜컥 샀다. 아마도 자신을 위해 뭔가를 하지 않으면 인생이 억울하단 생각이 들었나 보다.
수컷 호모 사피엔스들에게 자동차가 공작새의 꼬리나 엘크의 뿔 이상인 것이다.
후기: 수컷 공작새의 화려한 꼬리는 동물원에서 많이 보았다. 구애하는 장면을 많이 본 것이다. 그러나 공작새가 그 거추장스러운 꼬리를 달고 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궁금하여 유튜브에서 찾아보았다. 나는 모습은 처음이라 생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