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를 태우고 골프장 가는 길이었다.
친구는 작년에 은퇴했다. 거의 일 년이 다되어 간다. 곧 같이 살던 아들이 결혼하면 혼자 살게 될 것이다. 애엄마와는 사별했고, 재혼한 아내와는 이혼했다. 이즈음 몸도 예전 같지 않고 곧 결혼을 앞둔 아들과의 관계도 썩 매끄럽지 않다.
"내 인생이 억울해."
"뭐가 억울한데?"
"애들 키우며 돈 버느라 일만 하다가 은퇴하니까 아무도 나를 봐주지 않아."
"무슨 그런 소리를. 보자고. 일만 하지 않았어. 여행도 다녔고 골프도 칠만큼 쳤고 술도 남들만큼 마신 거 내가 다 아는데 뭔 소리여. 남들보다 늦게까지 돈 벌었고, 은퇴하고도 이렇게 매주 골프 치러 다닌다는 것은 여유 있게 산거라고. 근데 뭐가 억울해?"
"은퇴하면 해외여행도 다니면서 근사하게 살아야 하는데 못하잖아."
"그거야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해외여행 못 가는 거지. 곧 코로나 잠잠하면 사람들 해외로 여행 많이 가겠지. 그게 아니고 아들마저 결혼해서 집 나가면 독거노인 되는 것이 두려운 거지? 외로운 거지?"
인생이 억울하다는 소리를 전에도 들은 적 있다. 작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억울하다고 했었다. 10년 전쯤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80대 중반이었다. 이미 운전을 포기하고, 골프도 접었고, 외출은 병원 나들이뿐이었다. 매주 한 번 내가 모시고 단둘이 밖에서 점심을 했다. 주로 아버지가 좋아하는 평양냉면을 먹고 근처 카페에서 디저트를 먹었다. 아버지는 단 것을 참 좋아하셨다. 에스프레소 커피에 설탕 두 봉지를 넣고 레몬 케이크나 치즈케이크를 함께 먹었다. 이미 여러 번 들어 거의 외울 수 있는 지난 이야기를 하는 중에 자신의 인생이 억울하다고 하셨다. 그때도 나는 의아했다. 50대 후반에 하던 사업 정리하고, 30년 이상을 편히 사셨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무엇이 억울하단 것일까?
뭐가 대체 억울하단 말일까?
자신은 일하느라 인생을 즐기지 못해서 억울하단다. 난 아니라고 했다. 거짓말 말라고. 무슨 노동만 했냐고. 출장을 비롯해 여행도 많이 다녔고, 사업상이라며 골프도 수없이 치고 술도 남부럽지 않게 마시지 않았냐고.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던 것이다. 아니 올 줄은 알았지만 생각하기 싫었던 것이다. 잊고 산 것이다. 잊기 위해 술로 두뇌를 일부러 마비시켰다. 알코올은 약물이다. 괴롭거나 슬픈 모든 것을 잊게 한다. 그리고 잠들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알코올에 중독된다. 중독으로 생을 마치는 사람도 많지만 노인들 중에는 자발적으로 술을 끊는 사람도 나는 많이 보았다. 몸이 노쇠해지면서 술을 조금만 마셔도 어지럽고 심장마저 빨리 뛰어 괴로워진다. 그러면 결국 술을 끊더라. 안 마신다. 못 마신다. 죽을 것 같아. 그리고 정신이 든 것이다. 결국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하고 싶은 일도 딱히 없으면서 술마저 싫은 날이 오고만 것이다. 외롭고 심심하고 재미없는 날이 온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날이 매일이다. 난 열심히 살았는데... 이런 날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내 인생이 재미없어질 줄은 몰랐는데...
억울하다는 감정은 자신이 처한 사정이나 일이 애매하거나 불공정해서 마음이 분하고 답답할 때 쓰는 표현이다. 이제 삶이 많이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인생이 자신의 의지대로 풀리지 않을 때 이런 감정을 느낀다. 아버지도 내 친구도 억울하단다. 나이 든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억울한 감정을 느끼며 죽지 않을까? 껄 껄 껄 하면서...
나이 들수록 성숙해져야 한다.
성숙이란 과일이 충분히 익는 것처럼 어른스럽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성숙한 어른을 우리는 어르신이라고 한다. 모든 노인이 어르신은 아니다. 자신의 인생이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노인은 분노가 있다. 대상이 정해지지 않은 분노이기에 어느 방향으로 튈지 아무도 모른다. 가끔 그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성질 고약한 노인이 된다. 성숙한 어른은 계속 성숙해져야 한다. 세상이 변하고 주변 사람들도 변하기 때문에 자신도 변해야 한다.
계속해서 성숙하지 않는다면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당신은 살아 내고 있나요?
아니면 이미 죽은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