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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거니 Jun 26. 2016

캄차카 5

이 순간 이 경치를 즐기는 나를 방해하는 것은...

아침에 일찍 눈을 떴다. 오늘은 호텔 로비에 있는 여행사 사무실에 가서 어제 정하지 못한 관광 일정만을 확정하면 된다. 어제 젊은 남자인 세르게이와 이야기하는 중에 사실 좀 짜증이 났다. 살면서 그렇게 많은 여행사를 다녀 봤지만 여기처럼 손님에 별 관심이 없는 여행사는 흔치 않다. 모레와 글피의 관광상품을 알고 싶다는데 변변한 메뉴판조차 없이 메모지만을 앞에 놓고 잘 통하지도 않는 영어로 마냥 얘기를 끌고 간다. 1990년에 소련이 개방을 시작했으니 모스크바가 자본주의의 맛을 본지가 26년 밖에 안되었고, 소련의 가장 변방의 섬 아닌 섬 이 곳 캄차츠키가 자본주의의 꿀맛을 보기 시작한 것은 그 보다 훨씬 뒤일 것이다. 일년 중에 관광이 가능한 시즌이 워낙 짧고 방문하는 관광객의 수도 얼마 안되니 자본주의의 핵심인 공급과잉의 현상이 관광 분야에서 나타나지 못하는 것 같다. 새로 건설되는 아파트들이나 길에 넘쳐나는 중고자동차들을 보면 공급과잉인데 아직 여행분야는 아닌 것 같다. 호텔 로비에 변변한 관광안내 팜플렛도 없고 그 흔한 호텔 근처 지도도 안보이니 말이다. 이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내일 한국에서 이번 여행의 후반을 함께 할 친구가 도착하니 오늘은 관광일정을 확정해야 한다. 말 안통하는 세르게이와 오늘은 여행계획을 담판지을 요량으로 심호흡 한번 하고 여행사 문을 열고 들어 갔다.  문을 열자마자 보여야 할 세르게이가 안보인다. 불안한 마음을 감추고 "Good morning." 하며 세르게이 자리에 눈짓을 하니, 어제는 없었던 날씬한 러시아 아줌마가 눈에 들어온다. 그녀의 책상 옆에 앉았다. 어제 얼핏 들었던 한국 경험이 있다던 사람이 당신이냐고 물었다. 우와!! 서울에서 5년 동안이나 학원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치며 있었단다. 그래서 카카오톡도 한단다. 어제 세르게이와 그렇게 믿음이 안가던 아바친스키 화산 트레킹과 아바차만에서의 낚시 일정을 일사천리로 확정했다. 깎고 자시고 없이... 카카오 채팅방도 열어 궁금한 것이나 알려줄 것은 문자로 하기로 했다. 속이 다 후련하다. 역시 러시아 아줌마가 최고다. 오늘 할 일 다했다.

어제 일정도 특별한 것 없이 보냈고 오늘도 특별한 일정이 없다. 아바차만과 빌류친스키 화산이 잘 보이는 라운지에 앉아서 책과 스마트폰을 번갈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점심도 하나 남은 오뚜기 쌀떡국으로 해결하며 라운지소파를 독차지하였다. 너무 오랜 시간을 한자리에서 보내다 보니 갑자기 불안한 기운이 느껴진다. 혼자라도 시내관광하러 나가야 하는 것 아닐까?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 아닐까? 얼마나 어렵게 온 캄차카인데 캄차카의 구석구석을 열심히 휘젓고 다녀야 하는 것 아닐까?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멍때리거나 딩굴딩굴하면서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된다고 너무 어릴 때부터 받은 교육때문이리라. 이 엄청난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생산적인 무엇인가를 항상 해야 한다는 세뇌를 받은 때문이리라...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을 사는 현대인들은 스마트폰 덕에 아니 때문에 그렇게 멍때리거나 딩굴2 할 시간이 없다. 계속 세상은 변하면서 쏟아내는 뉴스를 접하며 카카오나 페이스북으로 연결된 지인들과 실시간으로 대화하고 있다. 간간히 이메일 체크하고 지인들이 보내주는 기사나 읽을거리 들을 이리저리 호핑(hoping)하다 보면 시간이 훅 지나버린다. 나를 생각할 시간적 여유도 없이...

생산적인 무엇인가를 하지 않을 때 느끼는 불안은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곳에서 이 좋은 경치를 즐겨야 하는 나를 방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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