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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거니 Oct 12. 2023

마침내 어르신


만 65세가 되면 우리나라에서는 공식적으로 어르신이 된다.


어르신은 노인의 대용어로 이즈음 널리 사용되고 있다. 노인이란 단어가 어느 때부터인가 부정적 이미지를 갖게 됐다는 것은 불편한 진실이다. 어르신은 원래 남의 아버지를 높여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었다. '어른'보다 더 격이 높은 느낌을 주며, 아버지보다 연세가 더 높으신 비친족 어른을 지칭할 때도 사용했다.


한국 남자의 평균 기대수명이 80.6세다. 건강수명은 73.1세라고 하니, 내가 한국남자 평균이라면 건강한 활동은 8년 정도 할 수 있고, 죽음을 기다리는 연옥 같은 기간(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서 지내는 기간 포함) 7년을 보내고 사망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한국남자 평균이란 근거나 증거는 전혀 없다. 난 어르신이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노인으로 10년이나 20년 뒤 미래를 계획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미래가 없는 어르신에겐 오직 지금 현재만 있다.


100세를 바라보는 철학자 김형석교수 같은 분도 있지만 그것은 아주 드문 예외다. 그분이 하신 말씀 중에 60세에서 75세까지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시기라고 했다. 의무와 책임 때문에 하는 노동을 졸업하고, 건강수명의 끝까지가 지나고 나서 돌아보니 인생의 절정기였다는 것이다. 공식적인 어르신이 되었다는 것은 지금이 내 인생의 절정기임을 뜻한다.


어르신이 되면 폐렴백신 무료접종 대상이다. 많은 어르신이 종국에는 폐렴으로 사망하기에 폐렴예방주사를 맞는다. 보건소인지 건강보험공단인지 헷갈리는 어디선가 전화가 왔다. 동네 의원에서 무료접종받으라고... 환갑 즈음에 분명 내 돈 내고 맞은 것 같은데 무료라니 한 번 더 맞아볼까?(맞으란다. 작용기전이 좀 다르고 코로나 2차, 3차 추가접종하듯이 맞으면 좋단다.) 독감백신도 이제는 무료다.


경로우대용 교통카드를 만들면 지하철이 무료다. 주민센터에서 선불카드를 만들든지, 신한은행에서 신용카드나 체크카드를 만들어야 한다. 지하철은 무료지만 환승하는 버스요금은 내야 하니까... 혼잡한 출퇴근 시간을 피해 지하철을 타면 노약자석은 항상 빈자리가 있다. 다리가 아파도 그동안은 차마 노약자석에 앉지 못했다. 내 자리가 아니라서... 이제는 당당히 앉으련다. 물론 나보다 몸이 불편한 노약자가 내 앞에 오면 자리양보하겠지만...


알람 없이 자고 싶은 만큼 자고 일어나 오늘 내가 꼭 해야 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 즐겁다. 한강을 가로질러 한 시간 넘게 운전하고 가서 참석해야 하는 회의도 없고, 오늘 해야 하는 강의도 없다. 조교를 찾을 일도 없고, 상담을 원하는 학생도 없다. 상담을 위해 학생과 시간 약속하는 것이 솔직히 정말 싫었다. 회의는 수당으로, 강의는 월급으로 보상받는다. 그러나 학생 상담은 의무일 뿐이다.


약속은 시공간의 한 점에 내가 존재해야 함을 뜻한다. 시공간의 한 점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미리미리 준비할 것이 많다. 장소와 시간을 기억하고, 약속의 중요도에 따라 치장하고 격에 맞는 의복을 챙겨, 시간 맞춰 심지어 공간을 이동해야 한다. 약속의 목적에 맞는 공부(강의 및 회의 준비)도 미리 해야 창피당하지 않는다.


지나고 나면 별 의미 없는 약속이 대부분이다. 그 약속들이 나 자신을 구속했다. 난 완벽한 자유인이 되기를 원했다. 시공간을 초월할 순 없으나, 최소한 내가 나 자신의 시공간을 통제하길 원했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생하는 존재를 우리는 신이라고 부른다. 초월하지 못하면 통제라도... 자신의 시공간을 통제하는 자유인은 신 바로 아래 위치한 존재다. 신과의 가장 큰 차이는 영생하지 못할 뿐이다.


마침내 영생하지 못하는 신 같은 존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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