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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거니 Oct 30. 2023

꼭대기


월요일 아침 오늘 서귀포의 날씨가 너무 좋아 어딘가를 가야 할 것 같았다. 어승생악이 생각났다. 작년인가 어승생악 주차장을 들어가는데 주차장 관리 직원이 어르신이면 주차요금이 감면된다 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 당시 아직은 아니지만 어르신 되면 꼭 다시 오겠다고 했었다. 맵을 찍어보니 서귀포 동굴에서 39분이 걸린다. 어승생악은 제주도 트레킹 코스 중에 가장 가성비가 좋다고 소문난 코스다. 1169m의 봉우리다. 어승생악의 악은 오름이 아니다. 주차장에서 1.3 km이고 왕복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주차장에서 등산화로 갈아 신었다. 신으면서 생각하니 이 등산화가 오래전에 어승생악을 오르기 위해 샀던 등산화다. 교회 차량위원회 겨울수련회를 제주도에 왔었다. 겨울 한라산 등반을 위해 등산화와 아이젠을 샀다. 사진을 찾아보니 2011년 1월 22일 교회 차량위원들과 눈 덮인 어승생악을 올랐다. 이 등산화가 13년 차다. 정말 질기게 오래 신는다. 이 등산화를 신고 남미도 갔고, 모로코도 갔고, 남아공도 갔다. 내가 물건을 무척 아끼는 사람인가 보다. 등산화 한 켤레로 13년 동안 온갖 산을 돌아다녔으니. 참 어려운 환경 속에 컸나 보다.


한라산에 가을 느낌이 완연하다. 큰 숨을 쉬며 거의 정상에 오르니 한 나이 든 여인이 내려가며 한마디 건넨다. "참 어렵게 오르셨습니다." "예"하며 답했지만, 속으로는 어려울 것 없었는데, 단숨에 올랐는데, 1.3 km면 골프장 파 5 3홀 정도 걸은 것과 같은데 하면서 보니 나이 든 여인의 머리가 완전 보라색이다. 눈이 부시다.  '10대도 아니고 최소한 60대 이상인데 어떻게 저런 색깔로 머리염색을 할 수 있을까?' 했다. 남의 눈 생각 않고 주체적으로 사는 분이구나 했다. 오전 10시에 어승생악 정상에 섰다.


정상에서 제주시와 공항이 잘 보인다. 공항으로 접근하는 비행기와 공항에서 막 이륙한 비행기가 다 보인다. 착륙은 서쪽으로부터 이륙은 동쪽으로 계속 비행기가 뜨고 내린다. 이런 광경 보기 위해 사람들은 정상을 찾는다. 정상을 밟아야 뭔가 한 것 같다. 끝난 것 같다. 그래서 모든 산의 정상은 정상표지석이 있고, 주변에는 이 돌과 함께 사진 찍는 아니 찍히는 사람들로 붐빈다. 정상에서 남쪽으로는 한라산 정상이 잘 보이고, 내려다보면 까마득히 저 아래 주차장이 보인다. 얼마나 올랐는지 알 수 있다. 아침으로 먹은 맥모닝 세트가 다 내려갔다.  


배드민턴 선수들의 하이라이트 경기영상을 열심히 보다 보면 세계적인 선수들의 순위의 변화를 모를 수 없다. 우리나라의 안세영 선수가 지금 여자 단식 1위다. 안세영 선수 전에는 일본의 아카네 야마구치가 한동안 정상이었고, 그전에는 중국의 천유페이가, 그전에는 대만의 타이쯔잉이, 스페인의 카롤리나 마린, 태국의 라차녹 인타논 등 수없이 많은 선수가 정상의 자리에 올랐었다. 정상을 평생 못 밟아본 선수가 태반이다. 실력이란 점점 상승하다가 어느 순간에 정점을 찍고 그다음은 천천히 내리막길을 걷는다. 내리막을 걷다 다시 반짝하면 사람들이 열광하지만 그 반짝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왜? 결국 노화하니까. 후배 선수들에게 자주 지는 모습을 보이다 보면 선수생활을 은퇴한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정점에 있을 때 내리막길을 준비해야 한다. 선수뿐 아니라 연예인도 마찬가지고 나 같은 일반인도 마찬가지다. 일반인은 자신이 언제 정점이었냐고 항변할지 모른다. 정점이었던 적 없다고. 그렇지만 모르고 지나갔을 뿐이다. 어느 날부터 몸이 말을 안 듣기 시작한다. 그것을 느끼면 이미 정점을 확실히 지난 것이다. 아침에 양치질하다가 하얀 액체가 배 위에 떨어지면 정점을 지난 것이다. 누가 내 발톱을 깎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 정점을 지난 것이다. 음식점 바닥에 앉는 것이 싫어지면 정점을 이미 한참 지난 것이다. 지하철을 타자마자 빈자리부터 찾으면 정점을 지난 것이다. 기대고 싶고, 앉고 싶고, 눕고 싶으면 한참 지난 것이다.


어르신이 되었다는 것은 정점을 지나도 한참 지났고 이제는 언제 어떻게 되어도 별로 이상하지 않게 된 것이다. 어르신은 언제 어캐될지 모르니까. 그렇지만 인정하지 않는다. 몸만 좀 노쇠했지, 머리는 노쇠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머리가 노쇠한 것이다. 몸보다 머리가 먼저 노화하는 어르신도 많다.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이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니 애써 외면한다.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의 많은 치매노인들이 어느 날 갑자기 치매가 온 것이 아니다. 치매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진행한다. 전조증상이 있지만 전조증상을 알아채지 못한다. 느껴도 인정하지 않는다. 물론 인정한다고 크게 달라지지도 않는다. 치매의 진행속도가 크게 변하지 않는단 말이다. 그렇지만 미리 인정하고 있으면 전조증상을 남보다 빨리 인지할 수 있다. 그래서 남보다 빨리 인생을 정리할 수 있고, 그래서 민폐를 덜 끼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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