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작은 섬이다. 제주공항에서 섬 전역을 한 시간 전후에 어디든지 갈 수 있다.
제주도는 큰 섬이다. 제주공항에서 서귀포, 성산, 모슬포까지 차로 한 시간 이상 걸린다.
무슨 소리냐 하면, 육지사람이 느끼는 섬의 크기와 제주도민이 느끼는 섬의 크기가 다르다는 것이다. 나는 육지사람이고 서귀포에 사는 아들은 제주도민이다. 신제주나 구제주에 사는 제주도민은 서귀포에 갈 일이 거의 없다. 서귀포에 사는 제주도민은 육지 나가기 위해 공항을 갈 때 외에는 제주시에 갈 일이 없다. 서울과 부산이 떨어져 있는 만큼 제주와 서귀포가 멀리 떨어져 있다는 말이다.
서귀포에 사는 아들 보러 제주도를 자주 오간다. 김포에서 월요일을 제외한 평일 새벽에 떠나는 비행기값이 저렴하지만 새벽부터 서두르는 것이 싫어 거의 늦은 오후 비행기를 탄다. 아들이 몇 시 도착이냐고 카카오톡으로 물어온다. 제주공항에서 나를 픽업하기 위함이 아니다. 서귀포 버스 정류장에서 나를 픽업한다. 제주공항 근처는 항상 정체구간이다. 비행기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의 렌터카와 제주도민들의 차로 도로가 꽉 찬다. 서귀포에서 육지에서 오는 누군가를 픽업하려면 거의 왕복 세 시간을 운전해야 한다.
서귀포, 중문, 성산, 대정에 사는 제주도민이 공항에서 당신을 픽업했다면 VIP 대접을 받은 것이다. 당신은 아주 귀한 손님이다. 난 아들에게 귀한 손님이 아니다. 귀찮고(자주 와서) 번거롭고(말이 많아) 짜증 나지만(잔소리까지)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손님이다. 제주도 집 값의 딱 반을 냈으니... 제주공항의 2번 버스정류장에서 181번 공항버스를 타면 산길을 한 시간 이상 달려 서귀포에 도착한다. 버스 배차 간격이 30분이 넘어 재수 없으면 공항에서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성북구 돈암동 집을 나와 서귀포 동굴에 도착하는데 6 시간 이상 걸린다. 심하면 7시간 가까이 필요하다. 늦은 오후 비행기면 서귀포 집에는 저녁 9시경에 도착한다.
새벽 다섯 시도 안돼 눈이 떠졌다. 오늘은 8박 9일 만에 귀경하는 날이다. 어젯밤 짐을 싸지도 않고 자면서 시계알람을 다섯 시에 맞추고 잤다. 그런데 알람 전에 눈이 떠졌다. 시계를 보니 4시 47분이다. 양압기를 벗고 눈물약을 넣고 일어났다. 아침을 먹고 캐리어를 싸고 샤워를 하고 7시에 아들을 깨웠다. 서귀포 중앙로터리 버스정거장까지 5분은 아들이 태워줘야 한다. 예전 언젠가는 "드디어 가는구나." 하면서 일어난 적도 있다.
공항 가는 182번 버스가 10분 뒤에 온다. 버스가 오는 것이 보인다. 빨간색 공항리무진버스가. 근데 오늘은 리무진고속버스가 아니고 그냥 빨강버스다. 리무진버스가 정비하거나 사고 나면 운행하는 대체용이다. 이런 버스는 화물적재함도 작고 좌석도 좁다. 오늘따라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캐리어를 적재함에 넣고 배낭은 메고 버스에 올랐다. 한 시간 이상 가기에 어느 쪽에 앉느냐가 중요하다. 지금 같은 아침시간에는 남에서 북으로 산 길을 이동 하기에 오른쪽 창문으로 계속 해가 들이친다. 그렇지만 제주시를 동에서 서쪽으로 가는 거리가 제법 되고 특히 교통체증이 있기 때문에 이 때는 왼쪽 창문으로 해가 들이친다.
잠깐 고민하다가 오른쪽 창가에 앉았다. 버스의 화물적재함 바로 위다. 버스를 기다리고, 타고 내리는 사람들이 잘 보인다. 서귀포 중앙로터리 정거장에서 버스가 거의 만석이다. 다음 정거장 비석거리 정거장에서 몇 사람이 더 탔다. 이때 버스의 화물적재함이 꽉 찼다. 마지막 사람이 캐리어를 싣지 못하고 들고 탔다. 다음 정거장인 토평사거리에서 난리가 났다. 여러 사람이 적재함에 싣지 못한 캐리어를 들고 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미 자리도 없다. 서서 가야 하는 사람이 제법 생긴 것이다. 리무진버스요금을 내고 서서 가야 하다니...
하례환승정류장이라는 곳에서 불편한 것을 보고 말았다. 이미 버스에는 캐리어와 함께 복도에 서 있는 사람이 제법 있다. 버스가 정차하고 두 사람 정도 더 탔는데, 운전기사가 더 이상은 곤란하다고 다음 차를 이용하라는 소리가 들린다. 밖을 보니 외국인 노동자 두 명이 큰 캐리어를 갖고 있는 것이 보인다. 결국 외국인 노동자 둘은 버스를 타지 못했다. 그들이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비행기 시간 늦는다고 사정하면 탈 수도 있었다. 그 옛날 만원 버스 수준은 아직 아니니까. 그리고 좀 길지만 다음 정거장인 성판악에서 한라산 등산객 4 명이 내릴 것이다. 운전기사가 그들이 들고 있는 캐리어 가방의 크기에 지레 놀라 차별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차별받은 그들이 걱정되었다. 삼사십 분 뒤에 오는 버스에 자리가 있다는 보장도 없다. 비행기 시간은 얼마나 남았는지 모른다. 내가 그런 상황이면 운전기사한테 사정하거나 우겨서라도 탔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는 카카오 T 앱으로 택시를 부를 것이다. 그 산자락에 택시가 올진 모르겠지만...
1998년 1월에 온 가족이 인도 라자스탄 지역을 자유여행하고 있었다. 열악한 버스를 타고 사막 주변을 지나고 있었다. 우석이를 창가에 앉히고 나는 통로 쪽에 앉았다. 버스는 아무 데나 정차하고 승객을 태운다. 버스 통로에도 사람이 빽빽하게 차기 시작했다. 내 옆 통로에는 반바지(?)만 입은 젊은 아빠가 완전히 벌거벗은 어린 딸을 안고 서 있었다. 아빠는 맨발이었다. 어린 딸은 아마 한 번도 목욕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머리칼이 산발이었고 서로 엉겨 붙어 도저히 눈 뜨고 못 볼 꼴이었다. 아빠도 마찬가지지만... 내 자리를 양보할 수가 없다. 그러면 저 부녀가 우석이 옆에 앉을 텐데 틀림없이 빈대나 이가 옮을 것이다. 우석이 표정도 가관이었다. 인도 뭄바이에서 구걸하는 많은 어린아이들을 이미 보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옷은 입고 있었다.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몰라 심히 불편하다. 나는 이 부녀가 내 어깨라도 닿을까 봐 더 걱정이다.
인도에 카스트 제도가 있고,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가 있다는 것은 교과서에 나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수드라에도 속하지 못하는 'Untouchable'이란 불가촉천민이 있다는 것을 그 이후에 알았다. 아직도 인도는 이런 계급이 엄연히 존재하고 이로 인한 사회적 비용과 갈등이 어마무시하다고 한다. 힌두교와 이슬람의 분쟁도 심하지만...
제주도 산간 농촌에 외국인 노동자가 많다. 차별과 모욕을 당하면서도 일하는 이유는 결국 가족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고국의 가족을 위해 자기 인생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도록 교육받거나 세뇌당한 것이다. 어쩌면 본능적으로 자신의 유전자 증식을 위한 희생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공항버스에 타지 못한 마지막 승객이 외국인 노동자였다는 것에 마음이 내내 불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