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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거니 Dec 11. 2023

고레에다 히로카즈

'괴물'은 누구게?

동네 음식점에 혼자 들어갔다.  일요일 저녁식사를 간단히 하고 7시 반에 시작하는 영화를 볼 생각이다. 홀 서빙하는 어린 학생이 한 명 있고, 주방에도 한 명뿐이다. 다섯 개 정도의 테이블 중 네 테이블은 사람들이 앉아 있고, 한 테이블은 방금 식사하고 갔는지 아직 치워지지 않았다. 주방 가까운 곳에 벽 보고 앉는 일인용 좌석이 두 개 있다. 일인용 좌석에 앉으려고 하는데 주방에서 일하던 뚱뚱한 주인아줌마가 한소리 한다.


“주문이 많이 밀려서 시간 좀 걸리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무슨 소리지? 바쁘니까 다른 음식점 가서 먹으라는 소리인가? 노인 혼자 왔다고 돈도 안되니 다른 데 가라는 얘기인가? 슬쩍 기분이 상하려고 하지만 이런 말로 내 감정을 소모할 필요 없다. “괜찮아요. 전 시간 많아요.” 사실 시간 많다. 영화는 한 시간 후에 시작하고, 또 늦으면 안 봐도 된다. 예매한 것도 아니고 누구와 함께 보는 것도 아니니 안 봐도 그만이다.


‘괴물’이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을 지금 꼭 봐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영화는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이지만 저녁밥은 지금 먹어야겠다. 점심도 맥도널드로 때웠고, 영화관 근처 음식점도 이미 둘러봤는데 수제버거랑 이탈리안 레스토랑 밖에 없다. 그나마 이곳이 오므라이스 전문점이라 들어온 것이다. 기다리는 시간이 결코 지겹지 않다. 스마트폰이 있으니까. 뉴스를 검색해 읽거나 내 브런치스토리를 열면 된다. 지난 글을 읽고 수정하거나 저장된 글을 더 보충하거나 하다 보면 시간은 잘 흘러간다. 생각보다 빨리(5분 정도 후) 내가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주인아줌마 생각에는 5분도 긴 시간인가 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봉준호 감독만큼이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감독이다.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2013년에 우연히 봤는데 그 기억이 아직도 내게 남아 있다.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좋은 영화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훌륭한 감독이란 얘기다. 그의 최신작 '괴물'이 일요일 저녁 7:30 아리랑 씨네센터에서 상영한다. 어제 토요일은 '서울의 봄', 오늘 일요일은 '괴물', 꽤 괜찮은 주말 저녁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일본 초등학교 5학년 남학생 둘(미나토와 요리)의 이야기다. 제목은 괴물이지만 전혀 무서운 영화 아니다. 잔잔한 영화다. 일본의 어느 바닷가 작은 도시(어디인지 찾아봐야겠다)에서 큰 빌딩 화재로 시작한다. Girl's Bar(일종의 유흥주점)가 있는 건물에 불이 났다. 방화일지 모른다. 아빠가 사고로 죽어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는 '미나토'와 엄마 없이 아빠와 둘이 살며 학대받고 있는 '요리'는 같은 반이다. 미나토의 아빠는 애인과 온천여행을 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었고, 요리의 아빠는 불이 난 걸스바에 있었다. 요리가 성정체성에 문제를 갖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보면 이해가 되는 장면들이 있다.


영화를 보면서 이해가 잘 안 되는 장면이 여럿 있었다. 늙어서 그런가 보다. 영화관에서 완전히 몰입해서 보면서 감독이 의미를 부여해 삽입한 장면을 이해 못 하다니... 그렇게 똘똘하던 재거니가...


마지막 장면이 깔끔하지 않다. 미나토와 요리가 환생한 것인지 태풍 속에서 무사히 살아난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다. 그렇지만 살았는지 죽었는지가 영화의 주제와는 전혀 상관없다. 그렇지만 이야기의 끝이 해피엔딩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착한 사람이 온갖 고난을 다 극복하고 행복하게 살든지, 나쁜 놈들을 모조리 때려눕히고 의기양양하게 개선을 해야 마음이 편하다. 감독은 그런 진부한 결말이 싫은 것이다. 진부한 결말은 영화를 진부하게 만든다.


진부한 영화가 마음은 편하지만 진부한 영화를 내 인생의 귀한 시간 내어 보고 싶지는 않다. 내가 할리우드 영화를 찾아보지 않는 이유다.


일본도(한국처럼) 초등학교 교사들의 수난시대다. 우리보다 먼저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리의 아빠가 집에 찾아온 담임선생에게 대뜸 어느 대학 나왔냐고 묻는다. 미나토의 엄마가 교장선생님 앞에서 따져 묻는다. 아니 교장선생님을 강하게 추궁한다. 선생님들은 그런 학부모들을 상대하느라 전전긍긍한다.


교실에는 괴롭힘을 당하는 학생이 있고, 괴롭히는 학생들이 있고, 이런 상황을 못 본 척 외면하는 많은 학생들이 있다. 괴롭힘을 당하는 학생 편에 선다는 것은 함께 괴롭힘을 당하겠다고 손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괴롭힘을 당하는 학생을 도와 괴롭히는 학생들을 때려눕히는 슈퍼맨 같은 학생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슈퍼맨 영화가 인기가 있는 것이다.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참 오래 학교를 다닌다. 학교 가는 것이 즐거운 학생은 얼마나 될까? 아직도 학교는 지각조차 없이 개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모가 있을까? 우등상만큼이나 개근상도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선생님이 아직도 있을까?


학교를 가는 이유는 좋은 친구를 만날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좋은 친구란 내게 자극이 되는 친구라고 생각한다.  만약 학교에 그런 친구가 하나도 없다면 학교 다닐 이유가 없다. 이런 결정은 누가 내려야 할까? 부모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선생님도 아니다.


학교는 확실히 문제덩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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