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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거니 Dec 21. 2023

냄새를 씻어내며...

막막하면 목욕탕을 간다.

어제 서귀포 동굴(  https://brunch.co.kr/@jkyoon/412 )에 왔다. 전국을 한파가 덮쳤고, 제주공항은 강풍주의보가 발령됐는데, 잔뜩 구름이 덮고 있는 제주공항에 내가 탄 비행기는 사뿐히 내려앉았다. A320 neo란 새 비행기였다. neo의 의미가 'new engine option' 이란다. 이즈음 비행기표를 사면서 비행기의 기종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무조건 싼 표를 사는 것이 아니다. 조금 비싸더라도 FSC(Full Services Carrier)를 선택하고, LCC(Low Cost Carrier)라면 새 비행기를 선택한다. 오래 살고 싶은 마음에 그러는 것 같지는 않은데... 


새 비행기를 타면 기분이 좋다.


아침에 일어나니 서귀포에 눈발이 날린다. 강한 바람에 눈이 옆으로 날린다. 기온은 영하 2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남쪽이 이모양이니 서울은 체감온도 영하 20도가 넘는 최강 한파란다. 어제 장거리 이동을 하여 피곤했는지 9시에 눈을 떴다. 서울이라면 배드민턴 가방을 챙겨 체육관을 갔을 시간이다. 해야 하는 일이 없다. 정년퇴직이 두 달여 남았지만 이미 은퇴한 것이나 다름없다. 할 일이 없으니...


막막하면 목욕탕을 간다.


동홍힐링사우나는 목요일 휴무고 현대목욕탕은 수요일 휴무다. 갈 곳이 정해졌다.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 항상 망설이는데 오늘같이 정해지면 마음이 편하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갈 곳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편하기도 하지만, 보통 가야 하는 이유는 노동을 하기 위함이다. 노동을 하지 않는 어르신은 갈 곳이 정해져 있지 않아 당황스러울 수도 있지만,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자유가 있다. 어르신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시렵니까?


망설임 없이 노동을 하러 가든지,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의 애매모호함을 택하든지...


갈 곳을 정하지 못하여 애매모호하거나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하면 목욕탕에서 냄새를 씻어내면 된다. 몸에서 냄새가 난다. 샤워기 밑에서 첫 물줄기로 정수리를 적실 때 흘러내리는 물에서 아저씨 냄새 아니 노인네 냄새를 나는 맡는다. 밤새 흘린 땀이 증발하면서 남긴 노폐물들이 흐르는 물과 함께 흘러내린다. 노인네의 땀 성분이 다르다고 한다. 지방이 산화되어 나는 냄새가 젊은이들과 다르다고 한다. 결코 향긋한 냄새가 아니다.


머리를 감고 물로만 샤워를 하고 사우나에 앉았다. 평일 오전에 목욕탕은 나이 든 어른들로 채워진다. 아이들은 없다. 다 학교 갔을 테니... 몸에 문신을 한 어른들이 보인다. 피부에 색소를 박아 넣는 작업은 제법 아플 텐데 왜 몸에 그림을 그리는 것일까? 캔버스나 종이 위에 그리지 않고... 예전에는 조직폭력배들이나 문신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즈음은 그렇지도 않다. 가슴에 털이 많은 젊은이는 등에 독수리를 그려 넣었다. 가슴 위쪽에는 영어 필기체로 누군가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저씨는 전신에 그림을 그려 넣었다. 앞뒤 할 것 없이 그려 넣은 그림의 의미도 알 수 없는데 멀리서 보면 핏줄이 드러난 것처럼 징그럽기 그지없다. 무슨 의미냐고 묻고 싶지만 차마 묻지는 못하겠다.


발가락 사이까지 비누칠한 거품타월로 빡빡 문지르며 온몸의 노폐물을 제거한다. 냄새를 제거하는 중이기도 하다. 발톱 가장자리 피부와 만나는 곳도 세심하게 문지른다. 여기에 노폐물이 쌓이는 것을 알고 있다. 구석구석을 두 번씩이나 비누칠하며 씻어낸다. 그렇게 씻어내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저께 외손녀 도은이를 처음 혼자서 픽업했다. 어린이집에서 픽업하여 딸이 살고 있는 집에 일 도와주시는 이모님(?)에게 넘겨주는 것을 부탁받았다. 어린이집에서 혼자 온 할아버지에게 안길까 걱정했다. 이제 겨우 딱 18개월이다. 둘만의 데이트가 가능할지 걱정되는 순간이었다. 최악의 경우 울부짖는 도은이를 카시트에 묶어 납치하다시피 10분간 운전하여 이모님에게 떠넘길 생각이었다. 어린이집 현관에서 나를 본 도은이가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한다. 얼른 받아 안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거울을 보며 거울 속의 도은이를 가리키며,

“이거 누구?”

“도니”

“이거는 누구?”

“하라비”

“할아버지 볼에 뽀뽀”

서슴없이 내 볼에 얼굴을 들이댄다. 도은이한테는 좋은 냄새가 난다. 아기로션 냄새라고 생각했다. 지금 도은이는 뽀뽀하며 무슨 냄새를 맡고 있을까? 아침에 면도 후에 바른 아라미스 애프터쉐이브 냄새가 날까? 도은이가 커서도 할아버지 아라미스 냄새를 기억했으면 좋겠다. 


아! 이 냄새 할아버지 냄샌데…


술냄새, 담배냄새, 노인네 냄새가 아니고, 아라미스 냄새를 기억했으면 좋겠다. 아라미스 냄새가 나는 꽤 괜찮은 남자를 만나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익숙함을 넘어 친근함을 느끼며 자신의 인생을 씩씩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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