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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거니 Dec 22. 2023

마지막 학과 회식


대학교 교수들은 강의하는 시간 외에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낸다. 강의 준비를 하고, 학생 상담을 하고, 때론 연구도 한다. 그래서 같은 학과 교수라도 부정기적인 학과 교수회의 말고는 딱히 만날 이유가 없다. 그래서 대학생들이 개강파티와 종강파티하듯이(요새도 하나 모르겠다), 매 학기 개강회식과 종강회식을 한다. 이번 학기 종강회식이 내게 마지막 학과 회식이다. 내년 2월 말로 정년퇴임하기 때문이다.


옆에 앉은 교수가 퇴임소감 한 말씀하라 했는데, 술 좀 들어가고 하겠다고 했는데, 술 좀 들어가니 딴 소리들 하느라고 정신없어 할 짬이 없었다. 2차 호프집, 3차 쿠바 칵테일바(주인이 쿠바 여행 갔다 와서 차렸다고 한다)까지 갔지만...


퇴임한다니 난 정말 좋다. 해야 하는 일을 이젠 안 해도 된다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해야 하는 일은 일종의 노동이다. 노동 자체를 좋아서 하기는 쉽지 않다. 아주 가끔 보람을 느낄 수도 있지만, 내 의지나 욕구와 상관없이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을 한다는 것은 바로 노동이다.


이즈음 궁금한 것이 있으면 유튜브에서 검색한다. 정년퇴직 이후의 삶에 대해서도 어마무시하게 많은 동영상들이 있다. 내용들은 거의 대동소이한데 그중의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갈 곳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침마다 눈뜨고 갈 곳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퇴임한 많은 교수들이 오피스텔을 하나 얻어 계속 연구(?)를 하겠다고 하기도 한다. 재취업을 권하기도 하지만 퇴임한 교수가 할만한 직업은 없다.(교수와 거지의 공통점 중에 다른 직업을 찾기 불가능하다는 유머도 있다) 난 이즈음 아침마다 갈 곳이 있다. 배드민턴을 치러 체육관을 간다. 아침 9시쯤 가서 몸 풀고 두 시간 정도 클럽회원들과 어울려 복식게임을 힘들게 하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면 정오를 넘긴다.


둘째는 의미 있고 재미도 있는 것을 찾으라고 한다. 재미만 있다면 금세 싫증을 느끼기 때문에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들 주장한다. 의미는 무슨 얼어 죽을 의미? 언제 어떻게 세상을 떠나도 자연스러운 어르신에게 대체 무엇이 의미가 있을까? 난 원래 의미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인생 자체가 별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염세주의자다. '염세'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세상을 괴롭고 귀찮은 것으로 생각하여 비관함'이라고 한다. 상당히 부정적인 단어로 취급된다.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을 짜 넣은 로봇 기계'라는 리처드 도킨스의 생각에 동의한다. 따라서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재미는 있어야 그나마 계속할 수 있다. 언젠가는 싫증 나겠지만... 그렇지만 재미는 상당히 주관적이다. 사람마다 재미를 느끼는 것이 다르다.


셋째는 건강을 지키라는 것이다. 건강수명(기대수명 말고)을 연장시키려는 노력을 하라고 한다. 결국은 영양과 운동인데 난 지금 배드민턴을 거의 매일 열심히 하고 있다. 배드민턴은 근육운동도 되고 심폐운동도 된다. 결국은 무릎을 비롯한 관절들이 망가져 얼마 후에는 못하게 될 것을 안다. 보통 배드민턴을 못 치게 되면 탁구를 시작한다. 난 수영을 할 생각이다.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헬스는 지루하다. 그래서 머신 위에는 TV 모니터가 있다. 수영장을 왕복하는 수영도 지루하긴 마찬가지다. 그런 수영 말고 스쿠버를 시도할 생각이다. 55세가 넘어 시작하려면 의사소견서가 필요하다고 한다. 소견서 써주겠다는 의사도 있으니 해볼 만하다.




한 달에 일주일 내지 열흘은 여행 말고 방랑을 할 생각이다.


여행은 보통 목적이 있다. 근사한 경치를 보거나, 맛집을 찾거나, 골프나 스쿠버 같은 액티비티를 하거나,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찾거나 테마 파크나 물놀이 공원을 즐기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뚜렷한 목적이 없어도 사람들이 그렇게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하는 이유는 일상이 힘들거나 지루하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이나 나이 든 사람이나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노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항상 여행을 꿈꾼다. 일상탈출을 바라는 것이다. 여행 유튜버가 그렇게 많은 이유다.


난 그런 목적 없이 길을 떠날 생각이다. 힘들거나 지루한 일상이 아니기에 굳이 일상을 탈출할 이유가 없지만 일상은 습관으로 가득 차 있다. 습관은 중독과 마찬가지로 다른 좋은 또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경험을 할 가능성을 차단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너무 편한 일상은 습관적으로 된다. 단골 음식점, 단골 술집, 단골 마트, 모든 단골이 일종의 습관이다. 습관적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주기적 방랑을 마음먹고 있다.


서귀포의 동굴을 비롯하여 필리핀을 비롯한 동남아가 대상이다. 구글맵에 방랑하고픈 장소들을 꾸준히 내장소(가고 싶은 장소)로 저장하고 있다. 가고 싶은 장소의 초록색 깃발이 노란색의 별표 표시된 장소로 바뀔 때마다 난 희열을 느낀다. 그렇지만 숱한 초록 깃발을 남기고 떠날 것을 안다. 영생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렇게 건강수명이 많이 남은 것도 아니기에...


방랑할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특권이다.

다이끼리가 있는 CUB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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