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바심이 문제다...
터키 여행을 워낙 여유롭게 다니다 보니 여기저기서 혼자 기다리는 시간이 많다. 관광지를 일없이 걸어 다니거나 버스터미널에서 기다리다 보면 엄청난 삐끼들이 설친다. 영어로 한국인이냐고 묻고는 그런 듯싶으면 한국말로 묻는다. 우선 남쪽이냐 북쪽이냐? 강남, 강북, 사당동, 영등포 어디 사냐고 묻는다. 한국에 있었다며... 자기 이름이 오지랖이라며 한국말로 대화하자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관심을 보이지 앉자 다른 유럽 관광객에게 접근한다. 이번엔 영어로 내게 한 말과 유사하게 말한다.
스마트폰이 있기 훨씬 전 하이텔통신이 있던 시절에 혼자 로마에서 3박 한 적이 있다. 지금의 동호회 카페에 해당하는 세계로 가는 기차란 동호회가 하이텔에 있었다. 거기서 정보를 얻어 로마 트레비 분수 근처에 한국 아줌마가 하는 피자집이 있고 그곳에 가면 한국 아줌마가 민박집도 소개해 준다고 했다. 공항에서 내려 어렵게 피자가게를 찾아갔더니 오늘 가게에 일하러 나온 아줌마가 민박도 하니 좀 기다렸다가 그 아줌마 퇴근길에 같이 가란다.
두 시간의 여유가 생겨 주변을 돌아보기로 했다. 트레비 분수에 떨어져 있는 무지하게 많은 동전을 보며 나도 동전을 던지고 소원을 빌었던 것 같다. 맥주나 한잔할 까 하고 두리번거리는 내게 잘 생긴 외국인이 지도를 들고 내게 길을 묻는다. 난 여행객이라 지리를 잘 모른다 하자 한국사람 같다고 한다. 반가워서 그렇다고 하자 자기 부산에 가봤다고 한다. 부산의 미스터 강이 자기 친구란다. 맥주 한잔 같이 하겠냐고 묻는다. 나도 마침 그 생각 중이라 좋다고 했다. 같이 가잔다. 그러면서 같이 걷기 시작했는데 너무 오래간다. 저 집도 맥주집 아니냐니까 자기가 좋은데 안단다. 그때 떠올랐다. 로마에서 삐끼 따라 술집 갔다가 술집에서 여자들이 합석하며 같이 한잔 했다가 엄청 바가지 쓰고 나왔다는 선배의 이야기가... 그러는 사이 여기서 마시자고 한다. 술집 앞에 험상궂게 생긴 덩치 좋은 친구가 버티고 있다. 지하 입구로 내려가잔다. 그 순간 시간이 없다고 둘러대며 내뺐다. 뒤에서 "Hey friend!" 하는 소리가 들린다. 친구는 무슨 친구!!
민박집 아줌마는 체격이 좋았다. 가운데 몸통이 아주 굵은 편이다. 아줌마는 이탈리아에 성악 공부하러 왔다가 이탈리아 사람과 결혼하여 공부는 중단하고 민박집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줌마의 굵은 몸통이 이해가 되었다. 이탈리아 남편은 경찰이란다. 세 밤을 자면서도 남편을 보지는 못했다.
로마는 여름에 너무 더워 관광이 고역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2월 말 러시아 출장을 가면서 ANA 항공편을 로마 3일 stopover로 샀다. 러시아의 출장일을 마치고 3일을 혼자 로마에 있으면서 나폴리, 폼페이 뿐 아니라 로마의 구석구석을 혼자 걸어 다녔다. 전화모뎀을 이용하여 하이텔통신을 하던 때라 지금처럼 호텔과 버스 안의 와이파이를 통하여 항상 실시간으로 가족과 친지들과 카톡 하고 페북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관광정보도 론리플래닛 영어판이 가장 좋을 때였다. 하루 종일 혼자서 로마의 볼거리를 찾아다니며 든 생각은 "다시는 혼자 관광 다니지 않겠다. 심심해 죽겠다."였다.
수십 년간 지켜온 절대로 혼자서는 여행 안 다니겠다는 신조를 버리고 지난 캄차카 6일과 이번 터키 21일을 혼자 여행하는 이유는 지난가을 라오스 여행 중에 읽은 책 '내가 혼자서 여행하는 이유' 때문이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은 재미가 아니라 자기 성찰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여행의 대부분의 시간을 자기 성찰에 보낸다고 했다. 나는 지난 일생 동안 행복을 찾아 여행했다. 가족과 친구와... 좋은 경치 보며 먹으며 수다 떨며 행복하려고 그렇게 돌아다녔다. 이제 환갑이 가까운 나이에 나 혼자 돌아보고 생각하고 싶었다. 성찰하고 싶었다. 일상에서 벗어나...
파묵칼레는 가까운 큰 도시인 데니즐리에서 요금이 1500원 정도인 미니버스 돌무쉬(한국의 마을버스)가 수시로 다닌다. 시간도 30분 밖에는 안 걸린다. 그래서 파묵칼레에서 출발하는 장거리 이동버스는 없다. 그러나 파묵칼레 마을 중심에 눈에 익은 버스회사들의 매표소가 몇 군데 있다. 버스시간표도 붙여 놓고 있다. 여행 중에 내일의 버스표와 내일 묵을 호텔이 정해져 있지 않으면 오늘 불안하다. 이방인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당했다. 직행버스라며 페티에 가는 버스표를 25리라에 샀다. 허름한 종이에 손으로 all paid라고 쓴 버스 티켓을 받았다. 다음날 10시 출발 때까지 속은 것 같아 불안했다.
아침을 먹고 어제 표를 샀던 매표소로 향했다. 지나가는 돌무쉬를 세우더니 나더러 타란다. 직행이라더니? 그러면 그렇지 하며 데니즐리의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돌무쉬에서 내리자 웬 친구가 나를 맞아 종이쪽지 같은 내 티켓을 쥐더니 돌무쉬 운전수에게 내 요금을 낸다. 그러더니 안내한 버스가 29인승 중형버스다. 대형버스회사인 메트로 간판을 건 파묵칼레 매표소에서 차멜리라는 동네 버스회사 표를 판 것이다. 대형버스를 타면 와이파이 빵빵하고 넓은 자리에 앉아 세 시간에 왔을 길을 나의 조바심과 방심 때문에 다섯 시간을 좁고 흔들리는 동네 버스를 타고 페티에에 도착했다. 완전 완행버스다. 아무 데나 서고 태운다. 한 30번도 넘게 서다 출발하기를 반복했다. 1500 m 가 넘는 고갯길도 넘어 내가 탄 버스회사 이름과 같은 차멜리라는 인구 2만 인 작은 도시에 도착했다. 여기가 이 버스회사의 본거지다. 깨끗하고 조용한 시골 도시이다. 사람들도 친절하고 호의적이다. 모두가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한다. 화장실 갈 여유를 주더니 다시 출발한다. 또다시 1500 m 가 넘는 한계령 같은 고갯길을 넘더니 페티에 바닷가까지 계속 내려간다. 한계령에서 양양으로 갈 때 바다가 보이던 경치가 생각난다. 내가 원하는 버스표는 아니었지만 지나고 나니 괜찮았다. 영동고속도로 두고 한계령 넘어 동해안 간 기분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앞으론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하고 영어만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