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ler's Rest Sports Bar
애매모호하고 불편한 상황이다.
모르는 외국인들과 골프를 조인해서 시작하는 순간이다. 1번 티에서 만나 이름을 교환하고 악수를 하고 가벼운 인사 소위 small talk를 해야 한다. 이런 경우 내 한국 이름을 외국인들이 발음하기 어려워 내 소개를 '제이케이'라고 한다. 내 이름 재건의 이니셜을 얘기하는 것이니 엉뚱한 이름을 지어낸 것도 아니다. 수염을 근사하게 기른 백인과 제법 큰 키의 백인과 오늘 조를 이뤘다. 네 명보다는 세 명이 훨씬 여유롭다는 것이 다행이다.
그들이 파타야에서 골프를 조인해서 쳐야 하는 상황을 내가 궁금하듯이, 그들도 내가 파타야에서 혼자 골프를 조인한 이유가 궁금할지 모르겠다. 수염을 기른 친구가 먼저 악수를 청한다. 자신의 이름을 "침"이라고 한다. 내가 제이케이라고 하자 기억하기 좋다고 한다. (근데 니 이름은 웬 침이냐? 영어 이름이 아닌 것 같으니 유럽의 어디 변방에서 왔나 보다. 덴마크라든지 스웨덴 같은 나라에서...)
다음은 키 큰 친구다. 악수를 하며 사이먼이라고 한다. 이름 좋네. 발음하기도, 기억하기도. 골프를 칠 수 있다는 것은 지금 상태가 아주 여유 있다는 방증이다. 거의 하루를 시간 내야 하고, 체력도 필요하고, 비용도 만만치 않으며, 심지어 모르는 사람과도 어울려 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은 심리적 여유도 많은 사람이다. 악수를 한다는 것은 내 손에 무기를 들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고 어디서 읽은 것 같다. 워낙 험한 역사를 살아낸 종이라...
첫 티에서 그날 처음 드라이버를 치는 것은 프로 선수도 부담된다. 그런데 이렇게 모르는 사람과 어울려 첫 드라이버를 휘두르는 것이 부담 안된다면 정말 뻔뻔한 인간이다. 제일 먼저 티샷 한 사이먼의 볼은 멀리는 갔으나 해저드와 가깝고, 두 번째 티샷 한 침의 볼은 왼쪽 숲으로 낮게 굴러 들어갔다. 다행히 내 공은 그렇게 잘 맞지는 않았지만 페어웨이를 지켰다. 첫 드라이버 티샷은 내가 제일 잘 쳤네 하며 안도했다. 시작은 좋은데...
사이먼이 나보다 드라이버 거리는 좀 더 나가지만 아이언샷과 어프로치가 정교하지 못해 스코어는 별로다. 침은 드라이버 거리도 나보다 짧지만 아이언 샷이 부드럽다. 충분히 해볼 만한 상대들이다. 그렇게 쫄 거 없다는 확신이 든다. 파타야의 4월 낮 열 시의 기온은 이미 33도다. 낮 최고는 35도를 예보하고 있다. 이런 기온에 작열하는 태양 밑에서 처음 만난 외국인들과 골프를 치는 것이 잘한 선택일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잘한 것인지 아닌지는 해봐야 알고, 잘한 것으로 만들면 된다. 어떻게?
3홀 정도 치고 파3 홀 티박스에 도착했는데 앞 팀이 아직 그린 위에서 퍼팅 중이다. 앞 팀이 끝나기를 기다리는데 사이먼이 뜬금없이 내게 묻는다. "제이케이, 너 태국 와이프 있냐?" 정색을 하며 내 아내는 한국에 눈 크게 뜨고 살아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사이먼, 너는 태국 아내 있냐?"라고 물었다. 10년 정도 함께한 태국여인이 있었는데, 1년 전에 헤어졌단다. 자기는 결혼할 맘 없는데 자꾸 결혼하자고 졸라서 피곤해서 갈라섰단다.
골프 라운딩 중에는 오직 하나에 집중한다. 어떻게 하면 작은 골프공을 남들보다 채를 덜 휘둘러 그린 위 구멍에 넣을 것인가를... 참 단순한 게임이지만 경우의 수가 무궁무진하기에 골프에 입문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 매력에 빨려든다. PC게임이나 스마트폰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을 한심하다고 생각하지만, 은퇴하고 매일 골프만 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프로도 아니니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나이 들어 거리도 안 나가면서 거리 내겠다고 온 힘을 다해 채를 휘두르고, 정작 스코어는 100을 넘나들면서 그렇게 열심히 치는 이유는 모든 것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은 죽음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잊고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자 오락에 빠져들어 모든 것을 잊는 것이나 대마초(태국은 합법이라 대마초 카페가 여기저기 많다)를 피우며 고통을 잠재우는 것과 매일 골프에 탐닉하는 것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골프는 운동이라 건강에 좋다고? 개소리다. 건강에 좋은 운동은 널렸다. 그리고 원백 원카트 원캐디 시스템은 걸을 일도 별로 없다. 카트에서 내려 휘두르고 다시 타기를 반복한다. 카트 운전도 캐디가 하고 라운딩 중의 모든 잡일은 다 캐디가 한다.
골프장에서 샤워를 하고 Traveller's Rest Sports Bar( https://brunch.co.kr/@jkyoon/684 )로 돌아왔다. 침과 사이먼이 나보다 먼저 도착하여 이미 자리 잡고 있다. 침이 자기네 자리로 오라고 손짓한다. 내 영어가 알아듣기 쉽다면서 내일도 같이 치지 않겠냐고 한다. Why not!
내가 침이라고 알아들은 침의 이름은 'Tim'이었다. 팀은 잉글랜드에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하고 24살에 호주로 이민 갔다고 한다. 지금은 Brisbane에서 아내와 살고 있고 20살 전후의 자식이 둘이나 있다고 한다. 나이는 56세이고, 전기기술자인데 석유 시추 관련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사이먼과는 같은 골프 클럽의 멤버라 자주 어울린다고 한다. 이번 여행은 사이먼이 제안해서 난생처음 파타야에 왔다고 한다. 정통 영국 발음 팀을 내가 침으로 알아들은 것이었다. 어이가 없다.
팀보다 두 살 많은 사이먼은 결혼한 적 없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영국에서 호주로 이주했고, 파이프라인 건설프로젝트와 관련하여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일하고 있단다. 일본 회사에서도 일 한 적 있고, 태국에서 프로젝트하느라 3년 동안 산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방콕, 푸껫, 파타야는 아주 익숙하단다. 파타야 인근 모든 골프장의 리노베이션 이력을 꾀고 있을 정도니 얼마나 자주 태국을 방문하는지 알 것 같다.
태국에서 태국여인과 살면서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호주 남자들이 많다고 한다. 그런 한국 남자들도 제법 있다. 외국인은 개인사업자 등록이 안되니 법인(회사)을 만들고 태국인 지분이 50%를 넘어야 한다. 그래서 보통 태국 아내의 지분이 51%이고, 외국인의 지분이 49%다. 법인의 비즈니스는 주로 외국인 남편에 의해 외국인을 상대로 운영된다. 태국 아내는 보통 카운터를 지키고 있다. 외국인 남편의 비즈니스가 잘되면 별 문제없지만, 항상 그리고 영원히 비즈니스가 잘 될 수는 없다. 그렇게 비즈니스가 돈이 안되면 태국인 아내는 남편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내가 태국인을 상대로 비즈니스를 하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은데... 저 남편 어떻게 처리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