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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거니 May 21. 2024

키르기스스탄 1

단독배낭여행

키르기스스탄 단독배낭여행 출발일(2024.6.22)이 다가오니 생각이 많다. 이미 키르기스스탄 여행 유튜브 동영상을 엄청 보았다. 눈 덮인 텐샨산맥의 경치에 아주 익숙해졌다. 가장 멋진 장면은 깊은 계곡의 개울가에 텐트를 치고 밤새 떨며 자다가 새벽에 일어나 텐트의 앞 지퍼를 천천히 올리면 텐트가 벌어지는 사이로 어마무시한 경치가 보이는 장면이다. 이 경치를 내 두 눈으로 보고 싶다면 소위 백패킹을 해야 한다.


완전히 눈 덮인 산속에서 텐트를 치고 자고 싶지는 않다. 얼마나 춥고 고생스러운지는 히말라야 등반 영상에서 많이 보았다. 그런 고생을 이 나이에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여름 텐샨산맥의 골짜기 고도 2600m의 알틴 아라샨에서는 해보고 싶다. 멀리 보이는 산 정상부에만 만년설이 남아 있다. 키르기스스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포베다(7439m) 정상은 아니지만 팔랏카봉 정상은 텐트 모양으로 독특하다. 알틴 아라샨은 2600m 이니 고산병의 위험도 없고, 텐트 옆에는 빙하가 녹은 물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다.


여름에 멀리 보는 설산에 대해 동경이 있다. 어쩌면 눈에 대한 동경인지도 모른다. 매년 겨울 첫눈이 오면 설레던 시절이 있었다. 첫눈이 오는 날 경복궁이나 창덕궁 같은 곳에서 애인과 만나기로 약속했던 시절이 분명 내게도 있었다.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첫눈에 대한 애틋한 추억이 설산에 대한 동경으로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키르기스스탄에서 3박 동안 백패킹을 준비하는 젊은 청년의 유튜브 동영상을 보았다. 1인용 텐트를 비롯하여 온갖 장비와 따뜻한 의류, 침구류, 딱 한 벌의 여분 팬티, 4벌의 양말, 10끼의 식사를 위한 음식과 에너지바, 유튜브 촬영을 위한 배터리팩 두 개와 비상용 밴드 등 준비물이 하나 가득이다. 공항에서 배낭 무게를 재니 딱 20 kg이다. 저 배낭에 물과 부탄가스를 추가해야 한다. 솔직히 엄두가 안 난다. 의식주를 다 들고 산을 올라야 하는데 이 나이에 저 배낭의 무게를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배낭의 무게는 전생의 업보라던데...


내가 자동차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배낭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자동차 트렁크에 모든 것을 얼마든지 때려 넣을 수 있다. 심지어 캠핑카나 미니밴이라면 트렁크 공간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 내 몸은 자동차 키와 스마트폰의 무게 정도만 버티면 된다. 그에 비해 백패킹은 꼭 필요한 것만 배낭에 넣고 다녀야 하니 계획이 중요하다. 아주 자세한 여행 계획을 짜지 않고는 백패킹을 할 수 없다. 천재지변이나 발병을 비롯한 사고 등으로 계획대로 여행이 진행되지 못한다면 탈수, 기아 및 동상 등으로 산에서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모든 계획을 완벽하게 짤 수는 없다. 그리고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할 경우의 백업도 준비해야 한다. 스마트폰도 안 터진다는 알틴 아라샨에서의 백패킹을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한다.




백패킹에 아주 능숙한 예쁜 여자가 있다. 나는 그녀가 주도하고 주관하는 백패킹을 따라다니기만 하면 된다. 그녀는 모든 계획을 세우고, 심지어 계획에 맞게 내 배낭까지 싸준다. 트레킹 중에도 그녀가 항상 앞장선다. 나는 그녀가 챙겨준 배낭을 메고 그녀를 따라 산을 오르며 근사한 텐샨산맥의 경치를 감상한다. 저녁때가 되어 그녀가 개울가에 텐트칠 장소를 찾았다. 난 그녀가 텐트 치는 것을 도와준다. 그리고 버너에 불만 피우고 식후의 모닥불을 준비한다. 그녀가 모든 음식을 만들고 심지어 뒷정리도 한다. 난 맛있게 먹어만 줘도 그녀는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산속 텐트에서는 밤에 엄청 춥다. 그래서 핫팩이나 온수통을 보통 안고 잔다. 온수통 대신에 난 그녀를 꼭 안고 잔다. 새벽 여명이 밝아올 때 아직 자고 있는 그녀의 볼에 키스한다. 그리고 텐트의 지퍼를 올리고 팔랏카봉 하얀 정상과 골짜기 양쪽 산이 만드는 어마무시한 경치에 감탄사를 연발한다!


이생망이다. 이생에서는 틀렸다. 이미 이생은 얼마 안 남았다. 다음생에서 텐트 안에서 새벽에 텐샨산맥을 보는 상상을 해본다.


인생도 초밥처럼 날로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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