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서귀포 동굴 정리

by 재거니

3년 전에 아들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서귀포로 갔을 때, 아들의 거처에 확보한 내 방(동굴)이 없어졌다.

( https://brunch.co.kr/@jkyoon/412 )


지난 3월 아들은 첫 숙소였던 오피스텔에서 나와 서귀포시 토평동 주택으로 거처를 옮겼다. 주택은 애견카페로 사용되던 곳이었다고 한다. 애견카페의 흔적을 지우며 워낙 낡은 주택을 리모델링하고 있다고 했다. 주택은 농지와 농막도 함께 있는데, 농막에서 자면서 손수 작업하고 있다고 했다. 자식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한 것은 모든 부모가 마찬가지다. 비혼을 선언했던 아들의 상황이 너무 궁금하다. 와도 잘 데가 없다는 아들의 말을 무시하고 일단 비행기표를 샀다.


아들은 부모의 전화도 잘 받지 않는다. 한참 무엇인가를 하는 중이거나 잘 때(자는 시간을 알 수 없다)는 부모의 전화도 받지 않는다. 간혹 한두 시간 흐른 뒤 리턴 콜을 하기도 하지만, 안부전화에 대해서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하는지 그냥 씹기도 한다. 그래서 아들에게 조심스럽게 카카오톡을 했다.


나: 모혀? 집은 언제 완성이야? 사진이라도 좀 가족방에 올려봐! 6월 12일 서귀포 가려고 비행기표 샀어.

며칠 째 답이 없다.

나: (비행기표 일정을 올리고) 두 밤만 잘게.

역시 아무런 응답이 없다.

나: 집 다 됐어? 담 주에 가면 잘 데는 있는 거야?

아들: 거의 다 돼가. 그렇지만 여기 사업장이라 잘 데 없어. 서귀포에 싼 호텔 많아.

(아들은 스쿠버 다이빙 샵 오픈을 준비 중이다. 예전에 스쿠버 강사 자격증을 땄고, 사업자 등록도 했다.)

나: 날도 따뜻한데 1인용 텐트 갖고 갈까? 마당에서 고기 구워 먹고...

다음 날 답한다.

아들: 여기 어딘가 아빠 잠자리 펴줄게.


아들은 아버지가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잔소리하는 것이 싫다. 그래서 아버지는 제대로 묻지를 못한다. 자식이 성인이 되어서도 독립하지 않고 부모 곁을 떠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정신적으로도 완전히 독립하여, 부모 품을 떠나 자신의 인생에 대한 충고 내지 조언(=잔소리)조차 거부하면 솔직히 서운하고 섭섭하다.


저녁 8시경에 제주공항에 도착했다. 아들에게 카카오톡을 했다.

나: 9시 20분 서귀포 도착예정. 먹을 거 있어?

아들: 먹을 것 없어.

나: 뭐라도 사놔야지.

아들: 와보면 알겠지만 여기 지금 먹을 장소가 없어.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은 서귀포시 외곽이었다. 제주도 특유의 좁은 돌담길 골목을 들어서자 분위기 있는 노란 LED등이 둘려 있는 하얀색 건물 앞에 아들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6개월 만이다. 이제는 이렇게 아들 보기가 쉽지 않다. 일단 한창 공사 중인 주택을 둘러보았다. 벽과 천장 공사는 마무리되었지만 바닥은 아직 먼지투성이고 여기저기 공구와 재료들이 널브러져 있다. 지금 샤워실과 화장실 공사 중이란다. 샤워실 바닥은 파여 있고 전선들이 천장에서부터 늘어져 있는 것이 이제 막 시작한 모양이다. 지붕만 있는 뻥 뚫린 공간에는 스쿠버 장비와 슈트들이 행거에 잔뜩 걸려 있다. 스쿠버다이빙 샵의 흔한 광경이다.


나: 완전 공사판이네. 언제 오픈이야?

아들: 7월에는 오픈해야 여름 장사를 하는데... 노력 중이야.

나: 밥 먹으러 가자. 이 시간에 먹을 데가 있을까?

아들: 뭐 먹고 싶은데? 삼겹살은 12시까지 하는 집 있고, 생선회집은 늦게까지 하는 집 있을까 모르겠네.

실내 포장마차에서 늦은 저녁을 했다. 아들은 지금 리모델링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다.


농막의 도어록키의 비밀번호는 예전 오피스텔과 같았다. 7평이 안 되는 농막은 화장실과 간이부엌도 있어 혼자 지낼만하다. 예전 동굴에서 내가 사용하던 소파베드가 펼쳐져 있다. 오늘과 내일 내가 몸을 누일 자리다. 제주도에 오늘부터 장마가 시작되었다. 간간이 내리던 비가 밤에는 엄청 쏟아졌다. 샌드위치 패널로 마감한 농막의 지붕이 밤새 빗소리를 요란하게 연주했다. 빗소리 때문인지 처음 자는 농막이라서인지 깊이 잠들지 못했다. 새벽에 일어났는데 영 꿉꿉하다. 베개와 침구가 눅눅해서일까?


여섯 시에 차를 몰고 혼자 서귀포 맥도널드에 갔다. 한라산은 비구름에 완전히 덮여 보이지 않는다. 20년 된 자동차의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는다. 당연한 것 아닌가? 폐차 직전이니. 앞 유리창이 습기 때문인지, 아니면 안쪽에 붙은 먼지 때문인지 뿌옇다. 뿌연 전방을 좀 더 잘 보겠다고 라이트를 켰다. 별 도움이 안 된다. 그러면서 아들의 미래도 이렇게 희미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사실 어르신인 나의 미래가 더 암울한 것 아닌가?


아들은 재미있다고 했다. 주택을 개조하는 것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자신이 직접 구현해 내는 것이 하나의 큰 작품을 하고 있는 기분이라고 했다. 샤워실 바닥의 트렌치와 화장실 변기를 사러 제주시에 가야 한다 하여 따라나섰다. 아들이 몇 달 전에 구입한 포터 트럭을 타고. 제주시 외곽에 어마어마하게 넓은 건물자재 마트에 갔다. 없는 것이 없다. 집을 짓고 집을 고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있는 것 같다. 아들이 쇼핑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화장실 변기며 샤워실 트렌치며 기다란 LED 조명과 부속품들을 카트에 실었다. 계산대에서 내가 카드를 꺼내자 아들이 그럴 필요 없단다. 자신의 사업자 카드로 계산하겠다고 한다.


무거운 화장실 변기를 트럭에 싣고 내리는 것을 도와줬다. 아버지인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것 같았다. 계속 비가 내려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마당에 널린 쓰레기들을 치우고 싶었지만. 오후에는 둘이 각자 낮잠을 잤다. 장마가 시작된 농막 안은 습도가 높아 꿉꿉하기가 최악이다. 벌떡 내가 일어났다. 그리고 소리쳤다.


"아들! 제습기 사러 가자."


아들은 제습기 효과에 대해 반신반의했다. 필요하면 인터넷으로 사는 것이 답이라고 했다. 내가 우겼다. 이렇게 하루도 더 못 자겠으니 근처 베스트샵에 가자고. 못 미더워하는 아들을 끌고 베스트샵에서 큼지막한 신형 제습기를 하나 샀다. 제습기는 전원을 연결하자마자 농막 안의 현재 습도가 85% 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조금 후에는 물통에 물이 차는 것이 보인다. 아들은 신기한 눈으로 물통 안의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본다. 두 시간 정도 지나자 좁은 농막 안의 습도가 60% 아래로 떨어지고 확실히 쾌적해졌다.


아들과 초밥집에 갔다. 아들이 소주를 주문한다. 어제처럼 차를 두고 택시 타고 갈 생각인 모양이다. 내가 맥주 한잔만 하고 운전했다. 장맛비가 샌드위치 패널을 두드리는 소리를 밤새 들으며 전날보다는 잘 잤다. 제습효과 때문인지 이틀 째 자는 것이라 익숙했는지 모른다. 새벽에 일어나 내 짐을 정리했다. 예전 동굴에서 내가 사용하던 물건들은 아들은 창고에 처박아 두었다. 골프채를 비롯한 내 물건들을 서울로 갖고 갈 생각이다. 버리더라도 서울 가서 확인하고 버릴 마음이다.


택시 트렁크에 짐을 싣고 아들과 가볍게 포옹했다. 언제 또 볼지 몰라...


p.s.: 제주시와 서귀포시는 택시로 한 시간 이상 소요되는 매우 먼(?) 거리다. 공항에서 서귀포가 차고지인 택시를 호출할 수 있다. 서귀포에서 공항 가는 택시뿐 아니라. 5.16 도로를 이용하여 한라산을 넘나드는 서귀포 택시 요금이 3만 원(미터 요금은 4만 원 이상)이란다. 서귀포택시통합 호출번호는 064-733-0008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