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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잊지 못할 기억

by 재거니

평생 잊지 못하는 기억은 제법 많다.

사람마다 다양한 많은 기억을 평생 갖고 산다. 한 맺힌 기억도 있고, 끔찍하게 슬픈 기억도 있고, 너무나 행복했던 기억도 있다. 크게 가치를 두지 않아 별 볼 일 없는 사건일 뿐이었지만 평생 잊지 못하는 기억도 있다.


1988년이었다. 88 올림픽 열기가 가라앉은 화창한 가을 어느 날, 난 처음 골프장이란 곳에 갔다. 연습장에서 딱 한 달 코치에게 스윙을 배우고 장인어른에 이끌려 용인에 있는 어느 골프장에서 처음 골프채를 휘둘렀다. 당연히 골프장도 기억하고, 누가 함께 했으며 얼마나 형편없이 그날 골프채를 휘둘렀는지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한두 번 드라이버가 제대로 맞아 'Good shot!' 소리도 들었지만, 그날의 'Shot of the day'는 4번 아이언으로 보이지 않는 그린에 공을 올린 샷이었다. 캐디가 최고의 칭찬을 해준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진짜 오늘 골프장 처음 나오신 거예요?"


골프에 정식으로 입문하는 날, 골프계에 데뷔하는 날, 머리 올린 날(난 이 표현을 싫어한다)의 기억.


골프에서 “머리를 올린다”는 말은 정식으로 골퍼로 데뷔하는, 즉 처음으로 필드에서 라운딩을 하는 중요한 시작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 표현은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대중화(?)되어 골프 입문자가 첫 라운딩을 마쳤다는 축하의 의미로 널리 쓰이고 있다. 이 표현은 조선시대 기생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당시 기생은 처음으로 손님을 맞는 특별한 날에 머리를 화려하게 틀어 올렸는데, 이것이 ‘머리를 올린다’는 표현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난 이 표현을 싫어한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이고, 가부장적 사회에서의 성차별적 표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은근 불편하다.


기생이 머리를 올린다는 것은 단순한 머리손질이 아니다. 철저한 신분사회에서 천한 신분인 기생이 마침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순간(?)을 머리를 올린다는 의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기생이란 신분에서 업(業)을 획득하는 아주 중요한 의식이다. 결혼을 꿈꿀 수 없는 기생에게 혼례식과 같은 의식의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골프 초보자가 첫 필드 라운딩에 나서는 것이 기생이 평생 한 번 하는 중요한 의식과 같은 수준이라는 것일까? 왜 골프연습생(?)의 딱지를 떼는 것과 동일한 표현을 사용한 것일까? 남자들은 올릴 머리도 없는데...


처음 이 표현을 사용한 사람은 첫 필드 라운딩이 그만큼 중요한 의식이라고 생각한 것 아닐까? 그리고 그 비유를 많은 사람들이 아주 적절한 은유라고 동의한 것 아닐까? 그렇게 사회에 널리 퍼진 은유는 더 이상 유래와는 상관없는 관용문장이 된 것이다.




딸( https://brunch.co.kr/@jkyoon/96 )이 손주들과 호찌민 40일 살기를 함께하지 않겠냐고 처음 제안했을 때, 난 골프가 떠올랐다. 손주들이 4주간 유치원을 다닌다면 그 낮 시간에 어른들이 할만한, 할 수 있는 것으로 골프를 생각했다. 이 기회에 딸을 골프에 입문시켜 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골프를 입문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많은 돈과 시간을 쏟아부어야 한다. 많은 에너지가 든다. 그렇게 힘들게 입문해도 계속 골프를 칠 수는 없다.


코로나 팬데믹 시절 많은 MZ 세대가 골프에 입문했지만, 팬데믹이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골프를 접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골프를 접은 이유가 골프가 잘 안 되는 108개의 이유만큼 다양하겠지만, 결국은 들어가는 비용, 시간과 노력에 비해 만족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즉 가성비가 안 나오기 때문이다.


골프는 정말 어려운 운동(?)이다. 정지하고 있는 작은 공을 정확하고 무섭게 갈겨야 할 때도 있고, 그린 주변에선 묘기에 가깝게 공을 띄우고 굴려야 한다. 인생 같이 굴곡진 그린 위에서의 퍼팅도 어렵다. 가까운 거리의 퍼팅은 혈압을 올리고, 먼 거리의 퍼팅이 용케 들어가면 자신의 인생이 행운이란 생각이 들지만 성공할 확률은 거의 없다.


호찌민 출발 딱 한 달 전에 딸에게 스윙코치를 받도록 했다. 호찌민에 도착하고서는 딸을 데리고 일주일간 매일 Driving Range에 갔다. 보통 스윙코치는 실내에서 받는다. 탁 트인 Driving Range에서는 자신이 친 볼이 어떻게 날아가는지 확인할 수 있다. 못 치는 것이 당연하다. 공이 날아가야 한다. 거리와 상관없이 최소한 50%의 공이 연습장에서 뜨면 골프장에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호찌민 주변의 골프장을 검색하고 연구했다. 가장 골프장이 한가한 월요일에 2인 플레이가 가능한 골프장을 찾았다. KLPGA 개막전이 열리기도 했다는 Twin Doves 골프장을 찾았다. 호찌민의 혼잡한 도로사정으로 인하여 겨우 34km의 거리를 이동하는데 한 시간 반이상 걸렸다. 잔디상태와 클럽하우스 시설은 아주 최상이었다. 참고로 호찌민의 대부분의 골프장은 점심뷔페 식사를 포함한다.


그렇게 딸에게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을 새겨줬다.

호찌민에서 난 큰 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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