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니가 가라! 하와이

by 재거니

하와이 하면 연상되는 것들이 있다.

1. 하와이는 미국의 제주도다. 태평양 한가운데 있어 주변이 망망대해다. 미국에서도 멀고 한국에서도 멀다. 비행시간만 9시간 정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거리 비행기를 타야만 하와이를 들고 날 수 있다.

2. 대표적인 허니문 여행지다. 9년 전 내 딸도 하와이로 신혼여행 갔다. 내 친구는 네 번째 허니문을 하와이로 갔다. 허니문에 견줄만한 근사한 여행은 없다. 잘 갖춰진 완벽한 휴양지란 환상이 사람들에게 있다.

3. 제주도 물가가 비싸듯 하와이 물가도 비싸다. 이즈음 달러가 강세라 미국 여행하기도 부담스러운데 하와이는 미국에서도 물가가 비싸기로 소문난 곳이다.


1993년 2월 말에 하와이 여행한 적 있다. 미국 Penn State Univ. 에서 박사 후 연수과정을 마치고 귀국길에 로스앤젤레스와 호놀룰루에서 스탑오버 했다. 호놀룰루에서 4박인가 했던 것 같다. 호놀룰루가 있는 오아후섬에만 머물렀다. 렌터카로 큰맘 먹고 Full Size car를 예약했는데 준비된 차가 도요타 캠리였다. 렌터카 사무실에서 어떻게 캠리가 풀사이즈냐고 했더니, 하와이에선 캠리나 어코드가 풀사이즈란다. 더 이상 큰 차 없다고 했다. 하나우나만이 기억에 남아 있다.


그 이후로 하와이를 가고 싶다는 생각 든 적 없다. 친구처럼 허니문을 갈 기회(?)도 없었고, 하와이보다 가성비 좋고 못 가본 여행지가 너무 많기에 하와이를 다시 갈 이유가 없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심장마비가 와 죽다 살아난 지인이 한국과 하와이를 오가며 수년 째 요양 중이다. 하와이는 겨울과 여름의 기온차가 2도를 넘지 않는다고 한다. 봄과 가을은 한국도 좋지만, 여름과 겨울은 끔찍하여 하와이에서 지낸다고 했다. 직장 동료로 만나 가끔 연락하는 사이인데 내가 쓴 브런치글( https://brunch.co.kr/@jkyoon/740 )을 카카오톡으로 보냈다. 당신 얘기를 썼다고... 내 글의 요지는 10년 넘은 중고자동차의 상태나 어르신의 몸 상태가 유사하다는 것이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아무리 정비를 열심히 해도 중고자동차로 장거리 운행하기 겁나고, 아무리 건강관리를 열심히 해도 어르신이 장거리 여행 떠나기 겁난다는 것이다.


바로 답장이 왔다. 하와이에서 혼자 지내고 있으니 오란다. 공항에서 픽업해 자기 콘도에서 재워줄 테니...




잠시 망설였지만, 끊임없이 방랑할 곳을 찾아 떠나는 내가 마다할 이유 없다. 미국을 가 본 지 10년도 넘었다. 8박 9일의 일정으로 아시아나 마일리지 항공권을 끊었다. 곧 대한항공에 합병되는 아시아나 마일리지를 빨리 소진시키는 것이 왠지 좋을 것 같아.


한국인은 미국 방문 시 ESTA(Electronic System for Travel Authorization)를 신청해야 한다. 쿠바를 비롯한 적성국가를 방문한 적 있으면 ESTA 신청이 안되고 정식비자를 신청해야 한다. 2020년 2월에 쿠바를 여행한 적 있지만, 쿠바가 테러지원국으로 분류된 시점이 2021년 1월 12일이라 그 이후에 방문했다면 정식 비자를 신청해야 한다. ESTA로 자동 허가 되었다고 해도 입국을 보장하지 않는다. 입국심사관이 결정권한을 갖고 있다. 입국심사 시에 많은 것을 물어본다. 어디서 묵을 거냐? 얼마나 있을 거냐? 돈은 얼마나 들고 왔니? 친구 줄 선물은 뭐가 있냐? Ala wai Blvd. 의 친구 콘도에서 8일 묵을 예정이고, 돈은 1000불 있고, 친구 선물 같은 것은 없다고... 당황하면 버벅댈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39층 콘도미니엄의 22층이다. 발코니에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있는데 경치가 백만 불이다. 바로 앞 요트 클럽의 마리나가 보이고, 멀리 진주만과 호놀룰루 공항이 보인다. 밤낮으로 크고 작은 비행기들이 뜨고 내린다. 착륙하는 비행기들은 보통 한 방향에서 줄지어 내리지만, 이륙하는 비행기들은 사방으로 흩어진다. 아시아, 미국 본토, 호주와 뉴질랜드, 남미 등으로...


15분만 걸어가면 와이키키 해변이라는데 가지 않았다. 덥지는 않지만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아무런 추억도 없는 해변가를 걷고 싶지 않았다. 골프장을 네 번 찾은 것 말고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발코니에서 보냈다. 마리나,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와 뜨고 내리는 비행기를 보며 많은 것을 했다. '바이올렛 아워'란 책도 읽고, PADI Open Water 사이버강의 수강도 했다.


바이올렛 아워(Violet Hour)의 의미는 ‘삶의 마지막 순간’ 또는 ‘죽음에 가까운 순간’을 의미한다. 이 표현은 삶과 죽음의 경계, 황혼의 깊은 울림을 묘사한다. 죽음 앞에서 느끼는 강렬한 삶의 욕망과 그 순간에 대한 성찰을 의미하기도 하고. 책은 프로이트와 딜런 토마스 같은 사람의 마지막 순간을 재구성하여 삶과 죽음에 대한 그들의 인식(철학)과 태도를 보여준다. 이미 절판된 책이라 동네도서관에서 대출하여 하와이까지 들고 왔는데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매일 저녁노을을 볼 수 있는 발코니에서 어르신이 오전 시간에 읽기 좋은 책이었다.


집주인이 매일 자기 전에 디카페인 커피를 내려 마신다. 혼자 마시기 뭐 했는지 내게도 항상 권했는데 여러 번 마시다 보니 커피 향도 좋고 따뜻한 차와 같은 효과도 있어 잠도 금세 들었다. 자기 전, 따뜻한 디카페인 커피 한잔은 습관이라기보다, 하나의 리추얼(Ritual)이었다. 하루를 정리하는 의식 같았다. 하와이 방문 후 내게도 새로운 리추얼이 생겼다.


하와이행 비행기표를 끊고 나서 계속 입가에 맴도는 대사가 있었다. "니가 가라! 하와이." 찾아보니 2001년 개봉한 영화 '친구'의 명대사였다. 하와이로 피신해 있으라는 친구의 제안을 거절하는 대사였다. 그리고 죽음을 맞는다.

https://youtu.be/dkPehjszHFE?si=s3V1wDFNeyTPcERy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