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함께 호주 캠핑카 18박 여행 중이다. 물론 손주 둘과 손주들의 외할머니인 아내도 동반이다. 사위는 직장 때문에 종반부에 합류한다. (자식들에게 캠핑카 여행 경험을 주고 싶은) 딸의 욕심 때문에 시작되고 기획된 여행이지만 나도 싫지 않다. 6살과 3살의 손주들과 24시간 캠핑카에서 부대끼는 것도 경험이고 즐거움이다.
화장실, 식탁, 침대, 간이부엌까지 있는 캠핑카를 여기서는 'Motorhome'이라고 한다. 벤츠의 스프린터(현대의 솔라티와 동급) 새시에 작은 집(house)을 올린 형태다. 워낙 길고 무거워 최고속도는 100 km/h라는데, 80을 넘어가면 운전대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캠프장에서 캠프장을 이동하는 것은 할 만하다. 그렇지만 복잡한 시내에서 운전하고 주차하는 것은 아주 꽝이다. 특히 한국마트가서 음식재료라도 사려면...
오늘은 브리즈번 근처의 동물원을 간다고 했다. 내 마음을 잘 아는 딸은 나를 빼고 입장권을 온라인으로 구매했다. 온전한 하루를 동물원 나들이에 쏟기 위해, 동물원 근처의 캠핑장(호주에서는 투어리스트파크 또는 홀리데이파크)에서 2박을 머물기로 했다. 손주들의 재롱을 보고 있노라면 3살까지 평생 할 효도를 다한다는 명언에 진심 동감하지만, 손주들이 24시간 재롱만을 피우는 것은 아니다. 어른 셋이 손주 둘 보느라 지칠 만큼 힘들다.
호모 사피엔스가 성인이 되는 과정은 엄청난 보살핌이 요구된다. 특히 영유아기에...
아침을 먹고 캠핑카로 8킬로 떨어진 동물원에 내려주고 홀로 캠핑장으로 돌아왔다. 온전한 하루가 나를 위해 주어진 것이다. 오늘 무엇을 할지는 어제 이미 정했다. 아내가 인천공항에서 샀으나 한 페이지도 읽지 못했다는 책을 볼 마음이다. '인생의 연금술'이란 책인데 어젯밤 훝어보며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자기 계발서인데 유려한 문장들이 많다. 은퇴한 노인이 무슨 자기계발할 일이 있겠나 싶어 소설책을 볼지언정 거들떠보지 않던 장르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림이 중요하다는 것에 동감한다. 젊은 사람들이 고민하듯이 노인들도 나름의 고민을 안고 산다. 결국은 어떤 마음가짐을 갖느냐가 자신의 인생을 결정한다는 어찌 보면 진부한 얘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래 문장에 난 큰 매력을 느꼈다.
'살아 있다는 단순한 기적, 볼 수 있다는 황홀한 축복, 말하고 움직이는 자유의 감사.'
이 문장은 젊은이보다 나 같은 은퇴 노인에게 어울리는 문장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기적이고, 아직 볼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고, 혼자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것은 건강수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캠핑카 운전을 하며 매일 손주들의 재롱을 볼 수 있다는 기적에 난 감사하다.
죽는 이유가 없듯이 사는 이유도 없다. 사는 이유가 없으니 그냥 즐겁고 가볍게 살자고 저자는 말한다. 그냥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는 것은 실존주의 철학의 기본이다. 존재함에 이유는 없다. 그러니 '개즐소충'하며 살자고 저자는 말한다. 개처럼 즐겁고, 소처럼 충실하게... 충실하지만 가볍게...
우리 삶이 괴로운 이유는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서다. 왜 그럴까? 우리가 원하는 것은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결과가 아닌 비교다. '내가 원하는 것', 그 욕구를 채우고, 그것을 채우는 과정에서 만족을 느끼면 우리는 바로 행복해진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것이 '모든 사람이 원하는' 욕망이라면 불행해진다. 욕망의 전제는 비교이며, 이 비교는 절대로 충족되지 않는 속성이 있다. 욕구를 채우면 행복하지만, 욕망을 충족하기에 우리는 불행해진다. [p.97]
책의 저자가 의사라고 해서 난 정신과 의사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구글링 해보니 '얼굴지방흡입술'을 전문으로 하는 성형외과 의사다. 보기 좋은 얼굴 라인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것을 업으로 삼는 의사가 이런 문장을 썼다는 것은 아이러니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