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wered Ensuite site
다섯 시가 넘으면 여명이 밝아오고 저절로 눈이 떠진다. 9시를 전후하여 잠자리에 들었으니 당연한 것 아닌가? 좁아터진 캠핑카 밖으로 나와 신선한 공기를 크게 들이 켠다. 5.2평(2.3 X 7.5 m)의 공간에서 여섯 명이 생활하고 있다. 평균 인생이 3만 일 정도라고 누가 계산했다. 그리고 어르신에게는 잘해야 3천 일 정도 남아 있다고 했는데 그 하루가 지금 시작이다. 내게는 얼마나 남은 것일까?
호주가 엄청 넓은 줄 누구나 안다. 땅덩어리가 한반도의 몇 배라는 건 의미가 없다. 섬이 아니고 대륙이라는 호주는 동부 해안(브리즈번에서 시드니)과 남부해안(시드니에서 멜버른 거쳐 애들레이드)에만 사람들이 모여 산다. 브리즈번에서 시드니로 루트를 잡은 것은 호주는 지금 봄이라 점점 따뜻해질 테니 조금이라도 선선한 남쪽으로 가겠다고 정한 것이다. 브리즈번 북쪽의 선샤인 코스트와 남쪽의 골드 코스트 부근에서 11박을 하고 있다. 내일부터는 부지런히 시드니를 향하여 달려가야 한다. 그리고 총 17박 후에 캠핑카를 반납할 것이다.
캠핑카(Motorhome)는 2인승, 4인승, 6인승이 대세인데 가장 큰 6인승을 렌트했다. 브랜드는 고급이라는 Maui다. 좋은 옵션을 다 선택하고 보험까지 최고로 넣으니 17박에 호주 달러로 6000불이 조금 넘는다. 9월 말이 여행비수기일 거라고 왔는데, 호주는 지금 일종의 봄방학 기간이라 괜찮은 캠핑사이트들은 캐러반과 모터홈으로 만원이다. 캠핑카라고 숙박비가 안 드는 것도 아니다. 하루에 50불 내지 150불 정도의 캠프 사이트 숙박비가 든다. 캐러번 파크에 주차하여 전기와 수도를 연결하고 하수를 버리고 때로는 변기통을 비워야 한다. 작으래야 더 작을 수 없는 모터홈의 화장실과 샤워공간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변기통에 용변을 보면 냄새가 나서 어른들은 사용하지 않지만, 밤에 자다가 깨 쉬 마렵다는 손주들은 어쩔 수 없다.
11년 전 원가족 넷이서 뉴질랜드 북섬을 캠핑카 여행했던 적 있다. 캠핑카의 시스템은 그때와 거의 달라진 것 없는데(그 당시 이미 최적화되어) 그 당시와 확실히 달라진 캠프장 시설이 있다. 캠프장 사이트마다 전기가 공급되면 Powered site라고 한다. 전기가 없으면 엄청 불편하다. Unpowered site라고 그렇게 저렴하지도 않다. 인원수에 따라 요금이 달라지는데 공용화장실과 샤워실 이용료라고 생각하면 합리적이다. Motorhome에 매일 전기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전기가 없으면 전자레인지가 작동하지 않아 많이 아쉽다.(가스레인지는 작동) Motorhome에 간이 화장실과 샤워시설이 있지만 너무 작아서 아주 급할 경우가 아니라면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캠프장의 공용화장실과 공용샤워부스를 이용한다.
캐러번 파크(Tourist park or Holiday park)가 그 사이 고급화되었다. Ensuite site라는 것이 생긴 것이다.
Ensuite site는 전용 화장실과 샤워실이 갖춰진 사이트다. 세면도구와 수건을 들고 공용샤워실까지 가고 오는 수고를 덜 수 있다. 전용이니 가깝고 훨씬 깨끗하다. 캠핑의 고급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한번 고급에 맛 들이면 고급을 벗어나지 못한다. 전기가 없는 사이트보다 전기가 있는 사이트가 고급이고, 전용화장실과 샤워실이 구비되어 있으면 가장 고급이다.
한 번도 Powered Ensuite site를 사용하지 않은 사람은 있지만,
한 번만 Powered Ensuite site를 사용한 사람은 없다.
호모 사피엔스의 적응력이 동물 중에 가장 뛰어나 지구의 최상위 포식자가 되었지만, 매일 전혀 다른 화장실에서 배설을 한다는 것은 일종의 스트레스다. 편안함, 안정감, 쾌적함이 없다. 아무리 날씨가 좋고, 경치가 좋은 곳이라도 거의 매일 다른 환경에서 하루를 보낸다는 것은 그리 마음이 편치 않다. 그래서 가능한 한 같은 장소에서 2박씩 머무른다. 익숙해질 만하면 새로운 캠핑장으로 떠나야 한다. 옆 사이트의 캐러번(견인되는 깡통집)의 브랜드 명이 'Wanderer'이다. 캐러번 브랜드 명으로 아주 근사한 선택이다.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방랑할 수밖에 없던 호모 사피엔스들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