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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콰도르 키토에서

by 재거니

가슴의 답답함을 느끼며 잠이 깼다. 머리도 아프다. 난 원래 두통을 모르는 사람이다. 어젯밤 열 시가 넘어 키토의 숙소에 도착하여 맥주 한잔과 초코파이 하나 먹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세시다. 애플워치로 혈중 산소포화도를 측정했다. 82%다. 믿을 수 없는 수치다. 건강한 성인은 95% 이상이 나온다. 서울에서는 항상 98 내지 99였다. 4년 전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볼 때 내 마지막 기억이 80%였다.


고산증상이다.


시차적응도 완전히 되지 않은 상황에서 비행기 타고 너무 높이 올라와 버렸다. 어쩔 수 없다. 방도가 없다. 몸이 고도에 적응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3000미터 이상의 고도에선 절대 자지 않겠다고 마음먹었기에 고산병약도 이번 방랑길에는 챙기지 않았다. 이곳 키토 숙소의 고도가 2800미터다. 나이 들면 당연히 적응력도 떨어지겠지. 계속 뒤척이다가 일어났다. 아침식사는 8시부터라고 했다.


아침식사를 하고 났는데도 가슴이 이상하다. 빈맥은 오지 않지만 심장이 뭔가 좀 불편하다고 계속 신호를 보내는 것 같다. 머리도 개운하지 않다. 어떡하지? 산소포화도를 다시 측정했다. 86%다. 새벽보다는 좋아졌다. 점점 적응하고 있으려니 싶다. 밤새 내리던 비도 그쳤다. 좀 걸어볼까?


ChatGPT에게 물었다. 숙소에서 걸어갈 수 있는 전망 좋은 곳을 추천해 달라고. Cafe Mosaic을 추천한다. 걸어서 30분 거리란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키토 거리로 나섰다. 긴장되는 순간이다. 키토여행 유튜브에서 봤다. 혼자 거리를 걷는 한국 유튜버에게 오물테러(냄새나는 물질을 물총으로 쏘는 것)를 하고 옷에 새똥이 묻었다고 현지인 둘이 닦아준다고 한국인의 정신을 쏙 빼놓고 그 사이 호주머니를 털어가는 것이다. 유튜버가 동영상을 찍고 있어서 그 상황이 거의 그대로 잡혔다. 만약 현지인이 내게 말을 걸면, 그냥 내뺄 마음으로 신발끈을 꼭 맸다. 그런데 역사지구(올드타운)를 걸어가는데 사람이 거의 없다. 나중에 알았다. 4일 연휴의 마지막 날 아침이었다.


경사진 길이 나온다. 앞에 보이는 언덕에 낮은 건물과 집들로 가득 찼다. 그 사이를 찻길과 계단을 번갈아 가며 계속 오른다. 숨이 차다. 고산증상으로 평지를 걸어도 숨이 차는데 언덕길이라니. 전망 좋은 곳이 평지에 있을 리 없다. 30분 걸린다는 길을 쉬엄쉬엄 걷다 보니 한 시간이 걸렸다. 드디어 도착. 저녁에는 예약 없이 올 수 없다는 곳인데 휴일 정오에는 아무도 없었다. 제일 전망 좋은 자리에 앉았다. 키토 시내의 파노라마가 눈앞에 펼쳐졌다. 성당과 유명한 산 정상의 천사상도 보인다. 극도로 긴장하며 지났던 역사지구와 힘들게 오른 언덕길도 내려다 보인다. 150미터 이상 오른 것 같다. 올라온 보람은 있다. 그렇지만 이 파노라마를 유튜브에서 봤다. 구글맵에서도 보았고...


하루 더 자고 났더니 많이 좋아졌다. 이제는 심장이 걱정되지는 않는다. 산소포화도도 93까지 올랐다. 화산트레킹을 할 것 아니면 키토에서 볼만한 것은 케이블카를 타고 4000미터까지 올라 주변을 산책하는 것과 적도 기념탑 공원을 가는 것이다. 에콰도르란 나라명이 적도를 의미한다. 케이블카는 숙소에서 가깝고, 적도 기념공원(Mitad del Mundo)은 자동차로 거의 한 시간 거리다. 관광에는 흥미가 없는 편이라 케이블카를 타기로 마음먹고 우버를 불렀다.


우버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작년 가을에 사용한 경험이 있다. 앱에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차량이 배차되자 4자리의 핀번호가 앱에 뜬다. 뭐에 쓰는 번호지? 우버차량에 탑승하자 기사가 핀번호를 달란다. 기사의 스마트폰에 핀번호를 입력하자 내 앱에 탑승확인 표시가 뜬다. 아아 기사와 승객을 확실히 매칭하는 방법으로 핀번호를 사용하는구나. 치안이 불안하니 이런 방법을 추가하여 승객뿐 아니라 기사의 안전을 도모하는구나.


에콰도르 국민은 케이블카 티켓가격도 싸다. 외국인 성인 왕복 가격이 9불이다. 에콰도르에서는 65세 이상을 Tercera Edad(영어로는 Third age)라고 해서 어르신 할인을 해준다. 스마트폰에 저장된 여권사진을 보여주니 6.5불로 할인해 줬다. 괜찮은 나라네. 참고로 에콰도르는 자국화폐가 없다. 미국 달러를 자국화폐처럼 사용한다. 미국에선 보기 힘든 1달러와 50센트 동전이 여기서는 널리 유통된다.


케이블카 탑승역의 고도가 3000미터이고, 하차역의 고도는 4000미터다. 심장병이 있거나 호흡기 이상이 있으면 탑승하지 말란 안내가 여기저기 보인다. 양압기를 사용하고 부정맥이 있는데 나더러 타지 말란 소린가?


'괜찮겠지. 예전에 4000미터 여러 번 가봤잖아.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순 없잖아.'


4000미터 케이블카 정상은 구름에 덮여 있다. 아무것도 안 보인다. 키토 시내 전경뿐 아니라 화산도 보여야 하는데... 사람도 별로 없다. 4일 연휴 다음날 아침이기도 하니. 정상에서 달달한 레몬케이크 한 조각을 커피와 먹고 바로 내려왔다. 잠깐 다녀와서 그런지 고산증상이 더 심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뭐 하지? 우버로 적도기념탑공원을 쳐봤다. 12불이 안된다. 아마 20불 정도였다면 가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정오니 적도 기념탑공원 가서 점심이나 해결하고 오자는 마음이 생겼다.


거의 한 시간을 달려 공원에 도착했다. 입장료가 5불이다. Tercera Edad 할인은 2.5불이다. 에콰도르가 좋아지기 시작한다. 예상했던 대로 공원은 별거 없다. 사람들이 그어 놓은 적도선을 밟고 열심히 사진을 찍는다. 적도 기념탑을 엘리베이터로 올랐다. 5층 높이 정도다. 탑 위에 전망대처럼 만들어 놓았다. 사방을 둘러보고 나니 더 이상 할 것이 없다. 그럴 줄 알았다.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인 곳에서 사람들은 열심히 사진을 찍는다. 괜히 나도 안 찍으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든다. 뭐를 기념하라고? 적도를 발로 밟았다고?


내일 페루의 리마 공항에서 환승하여 칠레의 산티아고로 간다. 점점 더 파타고니아로 가까이 간다.

적도 기념탑
탑 위에서 오랜만에 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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