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상상과 냉혹한 현실
방랑 중에 거쳐갈 숙소를 정하는 것은 신경이 많이 쓰이는 일이다. 거쳐갈 곳이기에 그렇게 정보수집에 많은 시간을 들이지도 않는다. 산티아고에서 2박을 하고 파타고니아 푼타 아레나스로 가는 계획이다. '그냥 산티아고 공항 근처에 호텔을 잡고 호텔 방 침대에서 종일 뒹굴다가 떠날까? 그러면 먹을 곳이 마땅치 않을 수 있어. 호텔 음식은 비싸기만 하고 내 취향이 아니잖아.' 호텔 부킹사이트를 뒤지는 것처럼 한심한 일 없다. 너무 많은 숙소로 인하여 결정에 어려움이 크다. 미리미리 예약하려 할수록 선택의 폭이 큰 것이 너무 많은 시간을 잡아먹는다. 하루나 이틀 전에 약간은 시간에 쫓기면서 선택하는 것이 차라리 내 인생을 절약할 수 있다.
산티아고 도착 이틀 전에 키토에서 숙소( Concha Y Toro 33 Hotel Boutique By Nobile )를 예약했다. 4성급 치고는 가격이 착해 예약했는데 산티아고 올드타운의 아담한 호텔이다. 작은 광장도 있고 방사형으로 3층 정도의 오래된 집들이 붙어있다. 길은 자동차가 교행 할 수 없는 정도라 모든 골목(?)이 일방통행이다. 호텔 바로 앞 건물은 완전 폐건물이다. 쓰러지기 직전이다. 저런 건물을 완전히 리모델링하여 호텔로 영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내부의 인테리어가 예사롭지 않다. 서울의 북촌이나 서촌의 한옥을 외부는 그대로 두고 내부만을 완전히 현대적인 입식 호텔로 개조한 꼴이라고 할까.
보통 예상할 수 있는 4성급 호텔은 아니다. 지하에 프런트와 작은 식당이 있고, 각 층에서 10개씩 3층까지 총 30개의 룸이 있다. 루프탑은 지금 공사 중인 것 같은데, 어울리지 않는 마릴린 몬로의 그림과 함께 공사도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숙소의 모든 시설에 익숙해지는데 보통 24시간이 필요하다. 하루가 지나야 좋은지 나쁜지 견딜만한지 편안한지가 결정된다. 그래서 하루라도 익숙함과 함께 편안함을 느끼기 위해 난 2박 이상을 한다. 거쳐가는 곳은 2박, 체류할 곳은 3박 이상을 예약하고, 하루 자고 나서 숙소를 옮길 것인지 연장할 것인지를 정한다.
오늘 오후에 도착할 푼타 아레나스의 숙소는 일단 3박을 예약했다. 푼타 아레나스의 아침 11시 지금 현재 기온이 9도인데 바람이 세게 불어 체감은 0도라고 아이폰의 야후날씨가 알려준다. '체감 0도라. 너무 추우면 3박만 하고 좀 더 따뜻한 곳으로 이동해야겠네.' 푼타 아레나스의 관광상품들이 대부분 11월 10일 모레부터 시작된다. 이제 시즌이 시작하는 것이다. 핫시즌에는 사람들로 붐벼 모든 가격이 오르고, 비시즌은 너무 춥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은 항상 공존한다. 당연한 것 아닌가?
61층 Sky Costanera 레스토랑 창가 자리에 앉아 주문한 스테이크를 기다리는 중이다. 내 앞 창가자리에 여인이 혼자 앉는다.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여인의 하얀 블라우스 밑에 브래지어 끈이 보인다. 아주 젊지는 않지만 어르신인 나보다는 훨씬 젊다. 코가 너무 오똑하고 뾰족하여 콧구멍의 길이가 무척이나 길다. 흰색 스티치가 어울리는 연한 갈색의 머리칼에 자주 손을 댄다. 긴 머리를 풀었다가 큰 집게핀으로 대충 묶기도 한다. 집게핀 주변으로 고정되지 않은 머리카락들이 삐어져 나온다. 베이지색 바지를 입고 있는데 뱀가죽으로 만든 구두가 보인다. 다리를 꼬고 앉아 엄지발가락으로 코가 뾰족한 구두를 흔들고 있다. 뱀가죽 구두를 신고 현대에 환생한 메두사인지 모른다.
갑자기 그녀가 등을 돌려 내게 미소를 띠며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Korea라고 했다. 그녀를 내가 계속 관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놀랬다. 나도 그녀가 어디서 왔는지 궁금하다. 러시아란다. 그녀의 머리색과 오똑한 콧날에 북유럽 사람들의 피가 섞여있구나 했다. 사진 좀 찍어달란다. 그러면서 나를 향해 돌아 앉는다. 심하게 풀어헤친 블라우스 앞 단추에 자연스럽게 눈길이 간다. 자신의 스마트폰을 건네며 야릇하며 우아한 미소를 짓는다. '인스타에 올릴 사진을 찍어달라는 것인가?'
내가 주문한 안심 두 덩어리가 올려진 스테이크 접시가 내 앞에 놓이며 정신이 들었다. 상상에 취해 있었다. 공복에 먼저 마셔버린 코로나 맥주의 취기 때문인가?
이즈음 로맨스 스캠에 당한 사람들이 제법 많다고 한다. 페이스북 내 게시물에 이상한 댓글이 달리더니, 이즈음은 브런치 내 글에도 요상한 댓글들이 가끔 달린다. 내 글이 너무너무 좋다며 만나보고 싶다고...
상상은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지만 현실은 아주 냉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