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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에서 안심

by 재거니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파랗다.


어제 밤늦게 칠레의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산티아고 공항에 비행기가 터치다운 한 시각이 저녁 열 시였다. 입국심사대와 세관을 통과하고 부킹닷컴으로 예약한 기사를 만나 호텔에 체크인하고 자정을 넘겨 잠자리에 들었는데 7시에 눈을 떴다. 어제 종일 리마에서 환승하여 키토에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비행시간은 두 시간과 세 시간이었지만 긴장했던 탓인지 무척 피곤하다. 달걀이 없는 호텔의 조식을 먹고 아침의 리추얼을 모두 끝냈는데 하늘이 너무 파랗다.


10년 전 배낭여행 패키지로 남미를 여행할 때 산티아고에서 2박을 했었다. 언덕 정상에 성모 마리아가 양손을 들고 서 있는 산크리스토발 언덕을 푸니쿨라를 타고 올랐었다. 식민지시대부터 있다는 아르마스 광장도 갔었고, 시장통의 유명한 식당에서 해산물로 저녁을 했던 기억도 있다. 이렇게 오래된 기억은 사진첩을 뒤지면 다시 생생해진다. 내일 이른 오후 비행기로 칠레 파타고니아의 도시 푼타 아레나스로 날아간다. 산티아고에서의 온전한 하루가 지금 내게 있다. 침대에서 뒹굴기에는 하늘이 너무 파랗다.


구글맵을 열어보니 숙소 근처에 'Museum of Memory & Human Rights'가 있다. 2년 전에 본 영화가 떠오른다. 'Eternal Memory'( https://brunch.co.kr/@jkyoon/601 )란 영화인데 칠레의 아름다운(?) 사랑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정확한 기억이 존재를 의미 있게 한다는 기자이자 작가인 아우구스토(기억의 재구성의 저자)가 알츠하이머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는 이야기다. 20년을 사귀다 결혼한 아내가 기억을 잃고 누워있는 아우구스토의 얼굴을 물수건으로 닦아주는 장면이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었다. 얼굴을 어루만지며 물수건으로 닦는데 귀와 귓바퀴 뒤를 정성이 지나쳐 거의 빡빡 닦는 장면이었다. '저 여자 뭐 아네! 귓바퀴 뒤가 냄새의 소굴이지. 매일 아침저녁으로 세수를 해도 저기를 씻기는 쉽지 않은데. 나처럼 매일 샤워하며 머리 감지 않는다면 저기서 고약한 냄새가 나지.'하고 생각했었다.


칠레는 1973년에 우리 귀에도 익숙한 피노체트가 군부 쿠데타를 일으켜 1990년까지 철권통치를 하였다. 그 고통스러웠던 17년의 기억을 박제한 박물관이다. 금요일 아침인데도 단체로 선생님이 인솔한 학생들로 거의 만원이다. 50년 전의 아픔을 기억하기 위한 곳이다. 박물관 4층에 올랐는데 창문을 통하여 산티아고를 내려다보고 있는 설산들이 보인다. '설산이 이렇게 가깝게 있었나?'


설산을 보기 위해 우버를 타고 'Sky Costanera'로 향했다. 남미에서 가장 높은 62층 빌딩이란다. 2015년에 전망대가 개장했다는데 기억을 더듬으니 2016년 산 크리스토발 언덕에 올랐을 때 이 빌딩을 멀리서 보면서 '다음에 혹시 오면 저 빌딩 전망대에 오르는 것이 좋겠다'라고 생각했었다. 10년 전 사진첩을 열어보니 산티아고 전경 사진에 이 빌딩이 있다. 10년 전 산티아고가 별로였던 것은 도시 전역을 낮게 드리워진 스모그가 전망을 망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오늘은 스모그가 아주 약하다. 어젯밤에 내린 비가 대기를 청소했구나 했다.


산티아고는 큰 산들이 에워싼 분지지역이라 대기의 순환이 원활하지 않은데, 강한 햇빛과 자동차 배기가스가 만들어내는 '광화학 스모그(Photochemical Smog)'가 유명한 곳이다. 1950년대에 로스앤젤레스가 이 스모그로 몸살을 앓았는데 그 원인이 자동차 배기가스의 질소산화물임이 밝혀져 그 이후로 자동차 배기가스 중의 질소산화물(NOx)의 규제가 전 세계적으로 도입되고 점점 엄격해졌다.


오늘 도시 전망이 끝내준다. 이런 장소에는 오래 머물러야 한다. 뭔가를 하면서. '출출하네 뭔가 먹자.' 61층의 전망대 한 구석에 식당이 있다. 가장 좋은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안심 스테이크와 맥주를 주문했다. 에콰도르의 키토에서 3박 하는 동안 제대로 먹지를 못했다. 2번의 저녁을 라면으로 때웠고 한 번은 굶었다. 단백질 보충을 해야겠다. 미디엄으로 잘 구워진 두 덩어리가 나왔다. 300g이 넘을 것 같다. 호텔 결혼식에 가끔 나오는 양의 다섯 배 이상이다.


'다 먹을 수 있을까?'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산티아고 Sky Costanera에서 설산과 산티아고를 내려다보며 우적우적 깨끗이 먹어치운 안심 두 덩어리를... 내 사진첩에도 박제했으니...

p.s. 철권통치기간에 약 4만 명이 구금, 고문, 해임, 망명 등의 탄압을 받고, 3천여 명이 사망 및 실종되었는데, 피노체트와 그 일당을 제대로 단죄하지 못했단다. 우리처럼. 피노체트는 91세에 산티아고 군 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졌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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