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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고니아의 석양

자기 인생을 자기 보다 더 고민하는 부모는 없다.

by 재거니

저녁 9시 22분이 일몰이라는데, 9시 반이 되었는데도 사방이 훤하다. 위도가 높은 지역에 오면 해가 참 천천히 진다. 내가 좋아하는 석양을 오래오래 즐길 수 있다. 태양이 산 너머로 뚝 떨어지지 않고 비스듬히 가라앉아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극지방 가까이 갈수록 사선으로 넘어간다. 그래서 북극권과 남극권은 하지에는 아예 해가 지지 않고 빙글빙글 돌아 백야가 만들어진다.


백야는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완전히 내려가지 않는 현상이다. 위도 66도가 넘는 남극권과 북극권에서 발생한다. 이곳 푼타 아레나스의 위도는 남위 53도다. 북반구에는 백야 비슷한, 밤에도 어둡지 않은 지역이 많다. 하지에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60도)와 노르웨이의 트로헤임(63도)에서 백야 비슷한 밤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일찍 자야 한다. 다음 주 푸에르토 나탈레스에서 Base Torres Excursion을 할 생각이다. 그런데 6:30부터 시작한다고 하니 그렇게 일찍 출발하려면 최소한 5시에는 기상하도록 내 수면 리듬을 돌려놓아야 한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새나라의 어린이가, 아니 노인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아주 천천히 어두워지는 은은하고 우아한 이 저녁 시간을 포기하기 쉽지 않다.




점심을 먹기 위해 호텔을 나섰다. 가벼운 빗방울이 세찬 바람에 실려 날린다. 아르마스 광장을 지나 자주 애용하는 Buda Express란 아시아 음식 식당을 들어서는데, 분명 한국인 같은 어린 처자가 내 뒤를 따라 들어온다. 나를 보고 한국말로 인사하려는 듯 머뭇거리는 표정이라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Where do you come from?"

"Korea."라기에, 한국말로 "그럼 같이 식사합시다." 하고 내가 합석을 강요(?)했다. 와이파이 패스워드를 알려주고 뭐가 좋냐고 묻길래 찰진 밥에 돈가스를 올리고 데리야끼 소스를 뿌린 'Gohan'이란 음식을 추천해 줬다.


버스를 타고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에서 이곳 푼타 아레나스에 왔단다. 국경을 넘어야 하고 마젤란 해협을 페리로 건너는 11시간 정도 걸리는 먼 길이다. 그런데 마젤란해협에서 바람 때문에 페리가 운행을 멈춰 7시간을 기다리고, 새벽 3시에 푼타 아레나스에 도착했단다. 근처 불 켜진 호스텔을 문 두드려 눈 붙이고, 오후 2시에 버스로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간단다. 아직 칠레 심카드도 없고 칠레 돈도 환전하지 못했단다. 아르헨티나에서 왔다길래 아르헨티나 여행하기 어떠냐고 물었다. 아르헨티나 경제가 망가져 인플레이션이 아주 심하다. 매일 아르헨티나 페소가치가 떨어져 환전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가능한 신용카드를 사용하고 손해를 감수하고 달러환전을 할 수밖에 없다고.


지난 3월부터 여행 중이란다. 베트남에서 가족여행을 하고 헤어져 단독으로 네팔, 인도, 파키스탄을 거쳐 이집트에 한 달 머물렀고, 이집트에서 한국여행객끼리 그룹을 만들어 케냐, 탄자니아, 보츠와나, 남아공, 나미비아를 거쳐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남미여행을 시작했단다. 대학생인지 취준생인지 아니면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세계여행을 떠난 것인지도 모른다. 묻지 않았다. 나이도 물어보지 않았다. 여행 관련 정보만을 공유했다.


한 가지는 물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시냐고? 살아 계시단다. 딸이 혼자 세계여행 떠나는 것을 말리지 않으셨냐고? 작년에 싱가포르 간다 속이고 혼자 인도여행을 했단다. 그래서 그런지 안 말리시더란다. 훌륭한 아버님이라고 했다. 11년 전에 26살인 내 딸이 혼자 세계여행을 떠나겠다고 했던 때가 생각난다. 인천공항에서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던 때가 떠오른다. 딸은 눈물을 글썽였다. '왜 울었는지 지금도 궁금하네.' 아내를 비롯하여 주변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허락할 수 있냐고 했다. 아빠가 어떻게 다 큰 딸의 인생 계획을 허락하고 말고 가 있냐고 했다.


자기 인생을 자기 보다 더 고민하는 부모는 없다.


'사춘기를 지난 자식의 인생을 방해하지 말라'는 어느 정신과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난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자식들을 다 키우고 나니 그럴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부모가 인생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심지어 짐이 되는 부모도 있다. '부모님과 헤어지는 중입니다.'란 책( https://brunch.co.kr/@jkyoon/670 )과 '세상에 나쁜 부모는 있다.'( https://brunch.co.kr/@jkyoon/867 ) 같은 책들에 나는 절대적인 공감을 느낀다.


점심값을 내가 다 계산하자, 아르헨티나 지폐 10,000페소를 내게 내민다. (내가 아르헨티나로 갈 것을 알기에) 비상금(?)으로 갖고 계시라고. 받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칠레 지폐 20,000페소를 줬다. 비상금으로 넣고 있으라고.


"혼자 여행하는 일본 어르신들은 가끔 보이던데, 혼자 여행하시는 한국 어르신은 오늘 처음 봬요." 한다.


오랜만에 한국말했다. 묵언 수행 중에...

30년 이상 된 스텔라가 너무 멀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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