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ce in a lifetime experience.
오늘은 화요일, 내일 Base Torres 트레킹이다. 어젯밤 자기 전에 숙소 아줌마가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 등반객이 실종되었다는 얘기를 해줬다. 한 명이 길을 잃었나 보다 했다. 그런데 오늘 저녁 뉴스에 5명(German couple, two Mexican, one British woman)이 사망하고, 4명은 구조되었다는 뉴스가 들려온다. 엄청난 눈보라와 허리케인 버금가는 폭풍 속에서 Los Perros Camp 주변에서 실종되었단다. 토레스 델 파이네 전체를 순환하는 O circuit trekking 중에 발생한 사고다. 투어가이드 없이 트레킹 중에 사고가 났다고 보도되었지만, 원래 6박 7일 동안 진행되는 이 트레킹은 self guided tour다. 여행사가 6박 하는 대피소 예약을 대행하고, 오가는 교통편을 제공해 줄 뿐이다. 결국 대피소에 예약한 날 체크인 하지 않으면 실종된 것이다.
Base Torres Excursion은 왕복 22km가 넘고, 올라가는 높이도 800미터가 넘는 당일 트레킹이다. 산행 시간만 10시간이 넘게 걸리고 트레킹 시작점은 푸에르토 나탈레스에서 150km 정도 떨어져 있어 차량 이동 시간도 만만치 않다. '어르신이 할 수 있을까? 혹시 무리해서 부정맥(빈맥)이라도 나타나면 어쩌지? 어제는 눈보라가 발생했다는데 옷은 어떻게 준비하고 가지? 산행 중에 먹을 것을 다 준비하고 오라는데 무엇을 사 갖고 가지?' 걱정과 고민거리가 장난 아니다.
'굳이 이 나이에 감행할 이유가 있나?'
바람이 좀 잠잠해진 저녁이다. 아직 태양은 넘어가기 싫다고 마지막 햇빛을 난사하고 있다. 트레킹 준비물을 챙기고(장갑 및 식량 구매) 저녁을 사 먹고 부지런히 숙소로 걸어가는 중이다. 푸에르토 나탈레스 중심가 어느 건물 앞에 테이블과 긴 의자가 나와있다. 아마도 주변 음식점에서 내놓은 것이리라. 머리가 금발인 백인 할머니(?)가 혼자 맥주잔을 앞에 놓고 담배를 손가락에 끼우고 넘어가는 태양빛이 떨어지는 곳을 응시하고 있다. 그리 넓지 않은 인도라 오가는 행인과 눈이 쉽게 마주칠 수 있는 거리다. 씩씩하게 걸어가는 내 발자국 소리를 들었겠지. 내게 시선을 돌린다. 눈이 마주치자 미소를 보낸다. 나도 미소 지으며 장갑 낀 손으로 엄지 척해줬다.
'당신의 그 여유가 부럽다고 한 것인데 알아챘으려나?'
새벽 6:10부터 6:50까지 트레킹 참가자들을 픽업하니 일찍 준비하고 있으라는 SNS 메시지를 받았다. 보통 WhatsApp을 사용한다. 참가자들이 시내 전역에 분산되어 있을 테니 다 픽업하려면 시간 좀 걸릴 것이다. '인원이 많은 그룹부터 픽업할까? 나 같은 단독 참가자들부터 할까? 도시 서쪽에서부터 훑으면서 오겠지. 아마 내가 가장 서쪽에 있는 숙소에 있을 거야. 내 숙소에서는 서쪽 바다가 보이니까.' 제일 먼저 픽업당할지 모른다.
6:10에 완전군장 아니 무장을 하고 대기하고 있으려면 난 4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이즈음 완벽한 아침 리추얼을 완성하려면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씻고 옷 입고 배낭 챙기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내 장을 완전히 비우고 쾌적한 몸 상태를 만드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나이 들수록 점점 길어지는 것인지, 급하게 출근할 일이 사라져서 그런지, 아니면 둘 다인지도 모른다.
벤츠의 스프린터를 꼭 닮은 중국산 JAC 미니밴이 픽업을 왔다. 오늘 트레킹 참가자는 미국에서 온 Jack과 Kim, 캘리포니아에서 온 히스패닉 아줌마 미아타, 멕시코에서 온 부부와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들, 그리고 브라질에서 온 내 나이 또래의 카우리 등 8명이 전부다. 가이드인 토마스와 보조가이드 카라가 오늘 그룹을 이끈다. 푸에르토 나탈레스를 벗어나자 길게 뻗은 도로를 신나게 달린다. 좌우로 멀리 산이 보이는 평원 사이를 한참을 가니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이 나타난다. 국립공원 입장료 37.67달러(3일 패스)는 온라인으로 지불하고 QR코드를 스크린 캡처해 두었다.
웰컴센터 앞 주차장에서 내려 가이드로부터 스틱과 아이젠을 지급받았다. 심호흡을 하고 이제 시작이다. 프랑켄슈타인을 떠올리게 하는 Jack은 목소리도 크고 말도 많다. 나와 함께 걷게 되어 몇 살이냐고 물었다. 60세란다. Jack의 동행 Kim은 약간 거북이 목으로 어기적거리며 앞서 간다. Kim은 몇 살이냐고 물었다. 72세란다. 오늘 산행이 많이 안심된다. 이 친구들보다는 내가 더 잘 걷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Kim과 Jack이 부자지간도 아니고 12살 차이니 친구라 보기에도 이상해서 너네 친구냐고 물었다. 아니란다. '파트너란다.' 하마터면 바로 다시 물을 뻔했다. 비즈니스 파트너냐고. 잭이 자기들의 여행에 대해 수다를 잔뜩 떨고 내 여행에 대해서도 계속 묻는다. '좀 귀찮게 구네'하고 생각했다. 영어를 알아듣고, 영어로 답하는 것은 금세 머리가 아파온다.
조금 걸으니 전망이 좋을 것이 확실한 Hotel Las Torres가 나타났다. 어젯밤에 검색한 바로는 하루 자는데 2,600달러다. All Inclusive라지만. 11월은 아직 시즌 전이라 여유가 있지만, 12월부터 3월까지는 이미 풀북이다. 주차장에서도 느꼈지만 엄청난 사람들이 오늘 Base Torres를 오른다. 중국인 단체여행객도 있다. 점점 더 안심이 된다. 그리고 바람이 전혀 없다. 종일 이렇게 바람이 없다면 운이 참 좋은 거다. 딱 중간 지점인 Refugio Chilleno에는 식당과 화장실이 있다. 화장실 사용료가 2,000페소란다. 그렇지만 식당이나 매점에서 무엇인가를 사면 무료이용이 가능하다.
줄지어 사람들이 오르는 것을 보면 시즌에 설악산이나 지리산 오르는 등반로가 생각난다. 10km가 길기는 참 길다. 거의 포기하고 싶을 때쯤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마 혼자서 올랐다면 '내가 이 짓을 왜 하는 거지?' 하면서 포기했을 것 같다. 가이드가 둘이나 붙어 있는 8명의 그룹이니 중도 포기할 수가 없다. 그렇게 결국은 세 번 정도인가를 쉬면서 오후 1:45에 Base Torres에 도착했다.
정상 직전 마지막 1km는 부서진 암벽으로 산사태가 난 부분을 계속 오르는 힘든 길이 있다. 앞사람 다리를 보며 줄지어 오르는 길이다. 이 길에서 두 번이나 고약한 방귀 냄새를 맡았다. 바로 앞이거나 앞에 앞사람이 분명할 텐데 '외국인 방귀 냄새 정말 구리네.' 그러고 보니 내 장도 꾸르륵 거리는 것 같다. 짐이나 사람을 태우고 힘든 산을 오르는 말이나 노새들을 보면 오르막에서 힘을 쓰다 똥을 마구 싸댄다. 힘을 쓰면 항문에도 자연히 힘이 가는 거겠지...
Base Torres에서의 토레스 델 파이네 모습은 장엄했다. 그렇지만 사진과 유튜브 동영상으로 여러 번 본 것이라 나름 익숙하다. 사진과 유튜브 영상을 보지 않고 처음 봤다면 경외감에 엄청난 감탄사를 연발했을지도 모른다. 사진에서 본 대로, 영상에서 본 대로 세 개의 타워(Torres)가 우뚝 솟아 있다. 그 바로 밑에 에메랄드 빛 호수가 있다. 하늘에 구름은 있지만 구름이 타워의 모습을 가리지 않는다. 성공한 것이다. 이렇게 힘들게 올라왔는데 구름과 안개 때문에 타워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가는 사람도 부지기수란다.
겨우 30분의 시간이 주어졌다. 먹고 사진 찍고 하는데... 그러면서 드는 생각 '이제 어떻게 내려가지?'하고 걱정이 앞선다. 옆에 있던 Jack이 굴러 내려가야겠다고 농담을 한다. Base Torres는 사람들로 붐빈다. 사진 찍기 제일 좋은 스폿에는 줄이 늘어서 있다. 심지어 이 와중에 사진 찍는 바위 위에서 남녀가 올라 프러포즈하고 반지를 건네고 키스를 하는 의식(?)이 진행된다. 주변이 온통 손뼉 치고 소란스럽다. 옆에 있던 39살인 가이드 토마스가 혼자 중얼거리는 말속에서 'Regret'이라는 단어가 들린다.
내려가는 길이 지겹도록 길다. 멀리 눈을 이고 있는 산들이 근사하지만 빵 몇 조각 먹고 10시간 가까이 걸은 다리가 아우성이다. 왼발 뒤꿈치는 족저근막염 증상이 나타나고, 좌우 무릎은 비틀비틀하다. 무릎 연골은 재생이 안 되는 것이라 아껴 사용하는 수밖에 없다는데, 배드민턴 칠 무릎을 남겨야 하는데 하면서 스틱을 열심히 짚었다. 눈에 익은 길이 더 멀게 느껴진다. 이 길을 오르고 내리는 것을 밥 먹듯 하는 가이드는 무슨 생각을 하며 오르내릴까?
5년 전 코로나 창궐 시점에 3월 개학이 늦어진 틈을 타 혼자 한라산 등반을 했었다. 18km 길을 열 시간 걸으면서 내 인생에 더 이상 한라산은 없다고 다짐했다. 내 인생에 더 이상 5시간 이상의 트레킹은 없다고 다짐에 다짐을 하면서 내려왔다.
'Once in a lifetime experience'라고 되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