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이 많은 사람
"나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다. 저널리스트들이 다 그렇듯, 나도 엿보는 취미가 있다. 나는 흥미롭다고 느끼는 것에 대해 글을 쓴다. 예전에는 여행에 대해 글을 썼다. 나는 이미 알고 있는 세계와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행을 떠나곤 했다. 그럴수록 나는 더 먼 곳으로 가야만 했다. 남극 대륙에 세 번째 간 이후부터 나는 미지를 더욱 가까운 곳에서 찾기 시작했다. 낯선 곳을 찾아 삶의 틈새를 뒤졌다. 과학이 그런 틈새 중 하나였다. 죽음과 관련된 과학은 특히 낯설고 생소하며 혐오스럽지만, 그만큼 마음을 끄는 힘이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여행했던 곳들은 남극 대륙만큼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낯설고 흥미롭기는 남극 대륙 못지않으며, 그곳만큼이나 여러분과 나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Stiff written by Mary Roach'의 머리말 끝부분에서.
인천공항이었다. 3개월을 예상하고 떠나면서 책은 딱 한 권 'In Patagonia' 원서뿐이다. 오래전에 번역본을 읽었다. 방랑이 너무 무료하면 읽다 잠들기 위해 짐가방에 넣었다. 한글로 쓰인 책도 한 권쯤 있으면 좋겠지만 읽어버리고 나면 짐만 된다. 그리고 집에서 들고 나올 마땅한 책을 찾지 못했다. 공항 면세구역에 책방이 보였다. 진열되거나 서가에 꽂힌 책 중에 딱 한 권을 고른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카운터에 앉아 있는 여성에게 다가갔다.
"책 한 권 추천해 주세요. 읽기 쉽고 편한 책 말고, 어려워서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책을요. 저기 총, 균, 쇠 같은 책을 추천해 주시면 좋겠는데."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서가로 향했다. 잠깐 서가를 둘러보더니 '죽은 몸은 과학이 된다'란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을 검토할 시간도 별로 없었지만, 죽음이란 단어가 왠지 내게 다가왔고, 추천해 준 그녀의 성의도 있어 바로 계산하고 서점을 나왔다.
옮긴이가 'Stiff'를 '죽은 몸은 과학이 된다'로 번역(?)했다. 아직 반 정도밖에 읽지 못했다. 파타고니아에 오는 여정이 좀 늘어지기도 했고, 아직 바람이 무섭게 부는 파타고니아에서 흥분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칠로에섬에서 4박(앞으로는 항상 2박만 예약하고 머물지 떠날지 결정해야겠다)이 좀 무료하게 흐른다. 이때가 기회라 나와 같은 해 1981년에 웨슬리언 대학을 졸업하고, 2003년 44세에 처음 책을 출간한 메리의 여행(?)에 빠져들었다.
인간의 죽은 몸을 시체라고 한다. 시체는 stiff 하다. 시체의 다양한 용도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룬다. 해부학 교실의 용도뿐 아니라 의료 목적으로 또는 심지어 식용으로 인체를 사용한 사례 등도 다루고 있다. 자동차 충돌시험이나 무기의 효과를 검증하기 위한 용도 및 각종 사고의 진상을 알아내고 안전장치를 개발하는 데 사용되는 사체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뇌사 판정을 계기로 대두된 죽음의 정의와 장기이식에 관련된 문제, 영혼의 거처에 대한 논의 등이 특히 나의 흥미를 끈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그리고 시체라는 불편한 용어를 읽을 만한 주제로 바꿔놓았다.
메리는 남극 대륙을 세 번이나 갔다는데 지금 나는 남극 대륙과 내 평생 가장 가까이 있다. 아니다. 10년 전 배낭패키지여행 때 우수아이아에서 탔던 비글해협 유람선이 가장 가까웠다. 그 당시 우수아이아에서 비글해협을 사이에 두고 남쪽의 나바리노란 섬이 보인다. 그리고 섬에는 푸에르토 윌리암스라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보였다. 나바리노섬은 우수아이아와 달리 칠레의 영토다. 칠레 주민이 사는 가장 남쪽의 영토다. 칠레 해군 기지가 있고, 가장 위험한 바다라는 Drake Passage(남극 대륙과 남미 대륙 사이)의 Cape Horn과 가장 가깝다.
남극 항로를 갖고 있는 DAP 항공사가 푼타 아레나스와 푸에르토 윌리암스를 운행한다. 일요일 빼고 매일. 12월 중순의 일주일 일정으로 항공편과 숙소를 예약했다. 인구가 2,000명 정도라고 하니 숙소나 식당 같은 인프라가 어떨지 걱정된다. 적당한 가격의 숙소가 마땅치 않아 시내에서 좀 떨어진 오두막(?)을 예약했다. 주인이 공항 픽업서비스를 무료로 해준다는 것과 부킹닷컴의 리뷰가 너무 좋다. 남미 대륙의 가장 끝자락의 오두막에서 혼자 일주일을 보낼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이렇게 방랑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