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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con

by 재거니

코이아이케에서 테무코로 출발하는 날이다. 테무코에 볼 것이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니고, 코이아이케를 비행기로 벗어나려면 산티아고, 푸에르토나탈레스 아니면 테무코다. 테무코 가는 JetSMART란 저가항공사의 표를 샀다. 방랑인데 어딘들 상관있겠는가? 테무코는 칠레의 최대 원주민 부족인 마푸체(Mapuche)족이 많이 모여사는 아라우카니아주의 주도이다. 마푸체족은 칠레에만 160여만 명이 살고 있고(아르헨티나에도 20만 명), 칠레 전체인구의 8.8%를 차지한다고 한다. 테무코는 행정도시라 특별한 것이 없고, 100km 떨어진 큰 호숫가에 자리 잡은 푸콘(Pucon)이 유명(?)하다. 테무코 공항에서 푸콘으로 바로 이동해서 3박을 하고, 버스로 푸에르토몬트로 돌아갈 생각이다.


오늘 하늘이 정말 이쁘다. 잘하면 비행기에서 푸에르토몬트 주변의 칼부코화산과 오소르노화산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 그런데 어제부터 시작된 알레르기 비염이 아침부터 심하다. 콧물이 계속 줄줄 흐른다. 풀어도 풀어도 멈추질 않는다. 방랑을 시작한 지 한 달이 넘으니 면역력이 약해졌나? 알레르기 약을 먹어야 하나?


처음 가는 곳에 대한 설렘이 있지만, 막연한 두려움도 있다.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모른다. 가장 큰 걱정은 코이아이케 호텔에서 푸콘의 숙소까지 안전하고 편안한 이동이다. 발마세다 공항에서 코이아이케 숙소까지 합승택시(Airport shuttle)를 이용해 봤으니, 다시 공항까지의 이동은 익숙하다. 아니까 다 아니까. 호텔 프런트에 합승택시를 불러 달라고 어제 요청했다. 그렇지만 테무코 공항에서 푸콘까지의 이동이 걱정이다. 예약한 숙소에 문자로 문의하니 테무코 공항에서 합승택시 타고 오면 된단다. 그리고 합승택시의 홈피 링크를 보내왔다. 링크를 들어가 보니 당일 예약은 안된다. 설마 예약 안 해서 자리가 없지는 않겠지.


이동수단이 미정이면 불안하다. 숙소가 미정이면 더 불안하다. 불안이 장애 수준으로 높으면 방랑길을 떠나지 못한다. 아무것도 못한다. 그냥 집에만 있어야 한다. 사실 집이 제일 안전하다. 모든 것이 일상이고 습관적인 행동의 반복이다. 두뇌를 사용할 일이 없다. 사람들은 일상을 벗어나겠다고 집을 떠나 여행을 떠난다. 불안이 높으면 떠나지 못한다.



칠레에서 비행기 탈 때는 항상 안데스 산맥 쪽 창가자리를 미리 구매한다. 하늘에서 보는 안데스가 경이롭기 때문이다. 구글지도를 열고 산줄기와 호수의 모양을 보며 현재의 위치를 식별한다. 정상부의 하얀 눈과 빙하가 꽤나 이국적인 모습이다. 벌써 안데스를 따라 몇 번을 이동했는지 기억이 없다.


테무코 공항의 도착장 로비가 한산하다. 택시 승객을 잡기 위한 약간의 호객행위가 있지만, 공식 셔틀버스 창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푸콘 숙소까지 13,000페소. 거리와 시간만을 따지면 시외버스요금의 거의 세 배지만, 원하는 장소까지 데려다주는 서비스를 생각하면 무난한 가격이다. 겨우 세 명을 태우고 벤츠의 스프린터를 꼭 닮은 중국의 짝퉁 스프린터가 출발했다. 괜한 걱정이었다. 혹시 예약 안 해서 자리 없으면 어떡하지는...


화산이 보인다. 비야리까(Villarica)란 화산이다. 좌우 대칭의 원뿔형 화산이다. 아주 이쁘게 생겼다. 중년 여인의 젖가슴( https://brunch.co.kr/@jkyoon/646 )이 아니고, 처녀의 젖가슴 같다. 정상부가 젖꼭지처럼 생겼다고 우겨도 할 말 없겠단 생각이 든다. 호수가 보인다. 비야리까 호수다. 비야리까란 마을에 가까워진 것이다. 바다 같이 넓은 호수는 아니지만 제법 큰 호수다. 반대편 기슭이 아주 멀리 있다. 호수의 입구 격인 비야리까 마을을 지나자 호수의 남쪽 면을 따라 달린다. 호수를 바라보는 좋은 자리에 저택과 고급 호텔들이 끊임없이 도열해 있다. 그렇게 한참을 지나 비야리까 호수 동쪽의 푸콘에 도착했다.


설레고 긴장된 마음으로 아침에 출발하여 합승택시, 비행기, 또다시 합승택시를 타고 푸콘의 숙소에 도착했다. 머리가 벗어진 키 작은 백인 할아버지가 숙소 주인이다. 숙소 이름이 B&B Muller인데 u에 독일어에 많이 쓰는 움라우트가 찍혀 있다. 조상이 독일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숙소 앞에는 폭스바겐의 오래된 Type2가 서 있다. MPV(Multiple Purpose Vehicle) 개념을 처음 도입한 유명한 미니밴이다. 엔진이 뒤에 달려 있는 독특한 구조의 박스카다. 딱정벌레차와 같은 곡선 디자인으로 1950년부터 1979년까지 생산된 유물이다.


Hostal은 방이 전부 7개인데 내 방 번호가 6번이란다. 거실을 식당으로도 사용하는데 거실의 장식이 예사롭지 않다. 커피와 차가 항시 준비되어 있다. 찬장을 여는데 방번호가 쓰여 있는 투명한 플라스틱통이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다. 모든 통에는 접시와 커피잔을 비롯한 간이 식사도구가 들어 있다. 벽면에 칠판이 있는데 칠판에는 아침식사 시간이 둘로 나뉘어 있다. 7:30-8:50과 9:00-10:45. 전날 아침 먹고 싶은 시간대 옆에 방번호를 백묵으로 쓰란다. 백묵 정말 오랜만이다. 건물 출입구에 도어록이 장착되어 있는데, 이미 내 전화번호 끝자리 4자리로 세팅되어 있으니 항상 문단속하고 다니란다. 체크인하면서 이렇게 주의사항 많은 숙소 처음이다. '조상이 독일인이라 그런가?'


푸콘 시내로 나섰다. 기온이 무려 27도다. 아직도 쌀쌀한 파타고니아만을 방랑하다 너무 올라와 버렸나? 푸콘은 휴양지 냄새가 물씬 난다. 전형적인 고급 가족휴양지다. 메인스트리트 주변에 고급 식당과 비싼 물건을 파는 샵들이 즐비하고, 관광상품(비야리까 화산 등정, 래프팅, 카약킹, 집라인...)을 파는 여행사들 천지다. 잠시 망설였다. '화산트레킹을 해볼까?' 비야리까 화산은 고도 2,847m, 소요시간 10시간, 푸콘 출발 새벽 6시, 반드시 가이드 동반, 난이도는 보통이라는데 새벽 6시란 말에 포기했다. 지금 몸 상태도 좋지 않은데...


어디서나 이쁘고 하얀 비야리까를 볼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