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시계를 보니 9시 반이다. 7시 반에 아침을 먹겠다고 숙소에 요청했는데 지금 가서 달라면 줄까? 급하게 식당으로 갔다. 테이블에는 아침 먹은 식기들이 아직 치워지지 않은 채 널려 있고, 카운터에 앉아 있던 주인장 뮐러 씨가 하던 일 멈추고 나를 올려다본다. "뭐 먹고 싶어 온 거야?"
시리얼과 우유가 아직 치워지지 않았다. 내가 시리얼을 우유로 마는 동안 뮐러 씨는 먹고 난 식탁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TV에서는 칠레 대선후보의 토론이 재방송 중이다. "대통령 선거가 언제예요?" "이번 일요일!" 의자에 앉아 시리얼을 먹는데 배가 고프지 않다. 이상하다. 아침에 내가 배가 고프지 않다니...
이제야 정신이 든다. 난 정확하게 7시 반에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투숙객(오늘은 전부 3명) 중에 제일 먼저 말이다. 내가 먹기 시작했을 때, 나와 같은 날 체크인한 백인 노인이 아침을 먹으러 2층에서 내려왔다. 뮐러 씨와 대화를 영어로 하는 것을 들으니 자기는 내일 비야리까 화산 등반을 하기 위해 6시 반에 숙소를 나서니 내일 아침 필요 없다고 했다. 나보다 먼저 식사를 마치고 자기 방에 가서 작은 배낭을 메고 나왔다. 오늘은 어디 국립공원을 가려는데 스틱이 필요하냐고 뮐러 씨에게 묻는다. 뮐러 씨는 자기라면 스틱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그러자 노인은 자기 방에 가서 손잡이가 나무(골동품처럼 느껴졌다)로 된 스틱을 챙겨 나왔다. 내가 먼저 식당 문을 나서며 그를 위해 문을 잡아주자 고맙다고 했다.
테라스에서 담배를 물고, 대문을 열고 나가는 노인과 눈인사를 했고, 잠시 뒤에 나도 대문을 열고 길로 나와 비야리까 화산 쪽을 쳐다봤다. 낮게 드리워진 구름이 화산을 거의 전부 가리고 있었다. 이상한 모자와 복장을 하고 긴 머리를 한줄기로 땋은 여인이 종아리를 드러내고 어울리지 않는 까만 구두를 신고 나를 지나쳐 가는 것을 보면서 저 복장이 마푸체족 전통 복장인가 했던 것도 기억났다.
내 방으로 돌아와 화장실에서 아침 리추얼을 모두 끝내고, 다시 따뜻한 침대 속으로 들어가 어제 읽다가 만 '죽은 몸은 과학이 된다'의 시체 해부에 대한 역사 챕터를 끝내고, 시체의 부패에 대한 한 챕터만 남은 것을 아쉬워하며 깜빡 잠에 빠져 든 것이다. 그리고 늦잠 잔 투숙객인양 허둥지둥 식당에서 뮐러 씨와 마주한 것이다.
나이 들어 그런 건가?
칠레가 어디 붙어 있고 얼마나 긴 나라인지 누구나 알고 있다. 정말 긴 나라다. 무려 4,300km다. 북쪽의 아타카마 사막부터 남쪽 파타고니아의 푼타아레나스, 그리고 나바리노섬의 푸에르토윌리엄스까지...
칠레의 담배값이 비싸다. 한 갑에 5000페소 전후이니 우리 돈으로 8,000원이다. 한 달 전 방랑을 시작할 때 1.52던 환율이 지금은 1.6이다. 칠레의 국민소득을 생각하면 상당히 비싸다고 보인다. 그렇지만 어디서나 담배 피우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다. 거리 곳곳에 휴지통도 많이 설치되어 있기에 금연표시가 없다면 어디나 가능하다. 국립공원의 입구나 휴게소 같은 곳에도 별도의 흡연구역이 설치되어 있다. 산불의 위험이 크기에 나름 관리를 하지만 완전 금연은 아직 없다.
휘발유 가격이 1,300페소 정도다. 경유는 좀 저렴해서 1,000페소. 한국과 거의 비슷하거나 좀 비싸다. 다양하고 많은 자동차들이 도로를 달린다. 아직도 굴러다니는 것이 신기한 20년 넘은 차들도 많다. 특히 쌍용차를 비롯한 초기 스포티지와 투싼이 제법 자주 보인다. 파타고니아의 푼타아레나스나 푸에르토나탈레스에는 주택가 골목길에 버려진 차들이 자주 눈에 띈다. 타이어는 주저앉고 유리창은 반쯤 열리고 차 내부에는 잡동사니로 가득한 자동차.
음식값도 비싸다. 소위 길거리 음식이 아닌 한 한 접시가 10,000페소 이상이다. 레스토랑에서의 맥주와 와인 한 잔의 가격도 4,000에서 6,000페소. 그리고 레스토랑은 10%의 봉사료를 붙인다. 봉사료 추가하는 것에 대해 동의하냐고 묻기도 하는데 거기다 대고 난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국토가 긴 만큼 장거리버스 시스템이 잘되어 있다. 벤츠, 스카니아를 비롯한 중국의 신형버스들이 열심히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버스들은 철저한 좌석제다. 온라인으로 대부분 예약하고 외국인은 PayPal(국내 발행 신용카드 안됨)로만 결제할 수 있다. 예약한 것을 스마트폰에 저장해 두면 된다. 운전기사와 심지어 차장(장거리에만 있는듯)까지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있다. 버스를 탈 때마다 보면서 드는 생각 '얼마나 불편할까?'
택시는 많이 돌아다니지만 소통에 문제가 있을 수 있어 어디서나 우버를 사용한다. 도심에서 떨어진 공항에는 공항택시와 셔틀서비스(18인승 합승택시)가 있다. 작은 도시라면 셔틀이 숙소 앞까지 데려다준다.
트래블로그 카드 사용이 어디서나 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크레딧도냐 데비또냐를 묻기도 하는데 체크카드 사용이 안된 기억이 없다. 편의점 같은 곳에서 몇 천 페소도 카드사용에 아무 문제가 없다. 발마세다 공항에서 코이아이케 숙소까지 셔틀비용이 9,000페소였는데 운전기사가 단말기를 들고 다니며 일일이 카드결제를 한다. 생각보다 현금으로 꼭 지불해야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숙소는 외국관광객에게 19%의 부가가치세를 물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꼭 달러로 신용카드 사용을 해야 한다. 체크카드는 안된다. 그렇지만 코이아이케에서는 달러가 아닌 페소로 계산하여 신용카드 결제하는 경우도 있었다.
칠레에서 가장 큰 통신사는 Entel이고 2위가 Movistar다. 유심을 사용하지 않고 SKT의 로밍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는데 거의 문제없이 연결되었다. 오직 푸에르토트란퀼로 지역에서만 신호가 없었다. 칠레 사람들은 잘 연결되던데...
칠레를 방랑한 지 한 달이 훌쩍 넘었다. 모든 시스템에 익숙하다. 다음 주 일주일을 칠레 파타고니아의 남쪽 끝 나바리노섬의 푸에르토윌리엄스의 통나무집에서 보내고, 크리스마스날 푸에르토나탈레스에서 아르헨티나 엘칼라파테로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는다. 그리고 2월 2일 페루 리마 출발 애틀랜타행 환불불가 비행기표를 어제 샀다.
남미 탈출이 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