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erto Toro

나바리노 섬 안의 섬

by 재거니

두 시에 눈이 떠졌다. 바로 일어나 4시에 맞춰놓은 알람부터 껐다. 8시 반부터 잤으니 일어날 만하다. 오늘 다섯 시에 배 타러 간다. 집주인 알투르 카우케가 배 타러 가는 곳에 나를 데리고 가기로 했다. 알투르는 영어를 1도 못한다. 아니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것 같다. 다섯 시에 배 타러 가서 10시에는 돌아온다는 것만을 간신히 이해했다. 어디를 가는지, 예약된 투어에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내비게이션이란 단어만 알아들을 수 있을 뿐이다. 여권사진을 자기에게 보내란다. 배 타는 사람의 신원확인을 위해 필요할 것이란 것도 짐작할 뿐이다.


사과랑 계란 프라이 두 개 먹고 아침 리추얼을 완성했다. 4시 50분이 일출인데 4시에 나가 보니 이미 훤하다. 바람이 한 점도 없다. 파타고니아의 새벽이 이렇게 조용하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어제저녁에는 진눈깨비가 날렸다. 다섯 시 정각에 알투르가 집에서 튀어나오고, 금세 근처 Errante Ecolodge의 벤츠 스프린터가 도착했다. 운전하고 있는 호르헤는 이미 구면이다. 그리고 키 큰 백인 남자 한 명과 젊은 백인 여자 한 명이 타고 있다. 이 두 명이 배를 타고 투어를 가는데 알투르가 배를 운전하니 나를 꼽사리로 끼워준 건가? 호르헤는 영어를 좀 하기에 묻고 싶지만 운전하고 있는 사람에게 어디 가냐고 묻기는 좀 뭐 하다.


Errante Ecolodge는 내가 머물고 있는 숙소에서 1.2km 더 외곽에 있는 제법 고급(?) 숙소다. 하룻밤에 200불이다. 바닷가 언덕 위 전망 좋은 곳에 원목(?)으로 지어졌다. 저녁식사를 한 번 가서 했는데, 수프, 메인디쉬, 디저트로 이루어진 코스요리가 50불이었다. 이번 방랑길에서 먹은 가장 비싼 저녁이었다. 남미 대륙의 끝에서 먹은 정찬이었다. 호르헤가 Errante Ecolodge의 총지배인이다.


5km를 달려 항구에 도착했다. 무슨 배를 타나 보니 제법 큰 배로 간다. 다섯 명이 이렇게 큰 배를 탄다고? 28명의 실내 좌석이 있는 유람선이다. 제일 앞 줄에 양쪽으로 두 자리가 있는데 옆에는 노약자석이란 표시가 있다. 그 자리에 앉으라고 알투르가 안내한다. 호르헤가 시동을 걸고 운전대를 잡는다. 알투르는 배가 묶여있던 밧줄을 푼다. 최소한 두 명은 있어야 배를 띄우고 정박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키 큰 백인 남자는 칠레 산티아고에서 왔단다. '얘가 큰돈 내고 이 새벽에 유람을 하는 것인가?'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비글해협은 장판 같다.


항구를 벗어난 배는 속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300마력 야마하 엔진 두 개가 굉음을 내며 옥색의 두 줄기 물보라를 뿜어 낸다. 바다 물색은 아직 어두워 시커먼데, 대비되는 옥색이 정말 이쁘다. 배 앞의 해치를 열고 나가 키 큰 백인 남자가 뱃머리에 섰다. 영화 '타이타닉'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그렇지만 배 앞전은 바람이 엄청 분다. 난 오히려 배의 뒷전으로 갔다. 비글해협의 동쪽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어디까지 갈려나 무척 궁금하지만 무료 승선한 주제에 키를 잡고 있는 호르헤에게 묻기는 좀 그렇다. 알투르는 자리에 앉아 취침 중이다.


젊은 백인 여자가 칠레 남자와 동행인 것 같지 않다. 오히려 키를 잡고 있는 호르헤를 도와주고 있는 것 같다. 누구인지 무척 궁금하지만 분위기가 아주 싸하다. 호르헤는 내가 이 항해에 왜 동승했는지를 알 것 같지만, 다른 두 사람도 알까? 두 시간을 간다고 했다. 설마 혼곶(Carbo de Hornos)에 가는 것은 아니겠지? 혼곶은 정말 남미 대륙의 끝에 있는 제법 큰 암초다. 대서양에서 혼곶을 돌아 태평양으로 나가려다가 무수히 많은 배가 침몰했다고 한다. 혼곶 앞바다는 그렇게 무서운 바다와 동의어다. 비글해협의 가운데는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국경선이다. 아르헨티나의 Puerto Amanza가 보인다.


멀지 않은 바다 한가운데에 좌초되어 버려진 큰 배가 보인다. 낡은 보물선 같은 형상은 아니다. 좌초된 지 그리 오래된 배가 아니다. 아는 사람이 옆에 없으면 AI한테 물으면 된다. 비글해협 한가운데 좌초된 선박이 무슨 배냐고?


비글해협 동쪽(나바리노 섬 쪽) 한가운데에 보이는 큰 배는 MV Logos로, 1988년 1월 5일 스나이프 섬(Snipe Island) 암초에 좌초된 선교선(missionary ship)이다. 좌초 사연은 우수아이아(Ushuaia)에서 칠레·아르헨티나 영토 분쟁 지역(스나이프 섬) 통과 중 현지 파일럿 없이 항해하다 폭풍으로 암초에 표류·좌초됐다. 탑승자 120명(선교사·성경 등 화물) 전원 구조됐으나 선박은 포기, 현재까지 해협 중앙에 뼈대만 남아 육안으로 보이는 랜드마크가 됐다.(Perlexity)


나바리노섬을 따라 쉬지 않고 달리더니 이제는 남쪽으로 내려간다. 섬의 동쪽 끝에 선착장과 집들이 보인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Puerto Toro다.


Puerto Toro는 남극 기지를 제외하고 사람들이 사는 주거지로 가장 남쪽에 있는 것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1892년에 처음 형성되었고, 2025년 현재 상주인구는 24명이고, Puerto Williams에서도 접근할 수 있는 자동차 도로가 없다고 한다. 나바리노 섬 안의 섬인 곳이다. 선착장을 보니 사람들이 족히 10명은 이미 나와 우리 배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옆에는 큰 캐리어를 비롯한 짐도 잔뜩 있다. 이 배를 타고 갈 사람들이란 것이 짐작된다.


이제 좀 정리가 되었다. 새벽의 이 항해는 Puerto Toro의 귀향민들을 빼내는 연락선이었다. 나바리노섬의 많은 사람들이 오늘내일 섬을 떠난다. 다음 주 크리스마스가 있다. 명절 이동을 하는 것이다. 선착장에서의 가족들의 이별장면은 역시 짠하다. 보내기 아쉬워하는 사람들과 떠나기 미안한 사람들의 표정이 너무 적나라하다. 큰 짐과 함께 여섯 명이 승선했다. 크리스마스에 사람들은 가족이나 연인과 보내고 싶어 하는데, 난 크리스마스날 칠레(푸에르토나탈레스)를 떠나 아르헨티나(엘칼라파테)로 국경을 넘을 계획이다.


호르헤를 도와주던 백인 여자가 누구인지 알았다. 네덜란드출신이고 Errante Ecolodge에서 한 달 일을 도와주고 있단다. 영어로 Volunteer라고 했다. 자원봉사자? 일주일에 5일, 시간을 정해 주어진 일을 하고, 호스트로부터 보통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받는다. 오가는 돈은 없는 거다. 영어도 하고, 스페인어도 하고, 네덜란드어도 할 테니, 대체 넌 몇 개 국어를 할 줄 아냐고 물으니 5 개란다. 나머지 두 개가 뭐냐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궁금하지만...


혹시나 했던 혼곶은 못 갔지만 지구상 가장 남쪽의 마을 Puerto Toro를 얼떨결에 밟고 왔다. 그렇게 외진 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니... 하기는 이 일대는 오래전부터 원주민 야간족의 생활터전이었다.

https://maps.app.goo.gl/qpkT1YCGDo61nGBT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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