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바리노 섬을 떠난다.
'진정한 땅끝'이라는 나바리노섬의 푸에르토윌리엄스에서 7박을 'El Cauque Refugio'란 통나무집에서 지냈다. 스튜디오 형태의 통나무집에는 모든 것이 갖춰져는 있다. 냉장고도 있고, 더운물 샤워도 되고, 가스레인지랑 식기류도 있어 간단한 음식은 직접 할 수도 있고, 난방도 되고, 와이파이도 있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 다 있기는 한데, 문제는 그 상태가 열악하고 자주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계곡물을 길어 올려 사용하는 물은 약간 흙빛이 돌고, 수압이 낮아 샤워기를 올려 고정할 수가 없다. 낮에는 태양전지, 저녁 시간에는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사용하고 배터리를 충전한다. 발전기를 가동하는 시간 동안만 냉장고가 작동(?)한다. 자정 넘어서는 배터리로 버티는데 새벽이 되기 전에 배터리가 방전된다. 그러면 양압기도 사용 못 하고, 와이파이도 죽는다.
사과, 주스, 계란, 소시지, 햄, 치즈, 빵을 구비하고, 맥주와 포도주가 항상 대기했다. 푼타아레나스에서 구한 신라면 두 개가 일종의 구세주다. 두 번의 외식(Errante Ecolodege와 카페)이 있었다. 무려 7박 동안.
가장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난방이었다. 장작난로가 불만 꺼트리지 않는다면 화력은 괜찮은데, 장작 타는 그 구수(?)한 냄새가 24시간이라는 것이다. 난로에서 조금 새어 나올 수도 있지만, 그 일대가 전부 장작난로를 사용하니 날씨가 안 좋거나(거의 매일 안 좋음) 해가 지고 나면 일대의 공기가 장작탄 연기로 뒤덮인다. 피할 곳이 없다. 알레르기 비염이 생겨서 일주일 내내 고생했다. 알레르기가 이렇게 사람을 힘들게 하는 줄 처음 알았다.
창문 밖에는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는데, 통나무집 벽난로에서 장작이 활활 타고 있고, 양털 가죽이 깔린 흔들의자에 앉아 있다. 무릎 위에는 보던 책이 놓여 있고, 의자에 기대어 반쯤 졸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얼마나 낭만적인가?
창문으로 비글 해협과 눈 덮인 산이 보이고, 거센 바람을 타고 진눈깨비가 날린다. 통나무집 장작난로가 꺼질까 봐 열심히 들여다보고 자주 장작을 넣어줘야 한다. 수십 년을 창고에 있다가 막 나온 상태인 것 같은 의자와 소파가 있다. 소파 위에는 양털가죽이 깔려 있지만 그 색깔 때문에 앉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몸에 닿는 것도 싫다. 와이파이가 갑자기 꺼져 그나마 보던 맥북은 덮었고, 침대에 누웠으나 매캐한 공기에 숨이 막히고 콧물이 줄줄 흐른다. 와이파이는 언제 다시 연결되려나? 난롯불은 괜찮나? 저녁은 뭘 먹지? 아직도 며칠 밤을 더 자야지?
저녁 8시 비행기로 나바리노 섬을 탈출한다.
집주인 알투르는 통나무 집에서 기다려도 된다고 했지만, 항구 앞 카페에서 시간을 보낼 테니 저녁 6시에 공항까지 태워 달라고 했다. 새벽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사용하던 식기 설거지도 하고, 냉장고도 비웠다. 짐도 다 쌌다. 알투르가 새벽에 배 타고 일하러 나가, Volunteer 트리스탄이 나를 카페까지 태워다 줬다. 커피 한잔 마시며 컴퓨터 앞에 앉아 우아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WhatsApp의 알림 표시가 보인다. 스마트폰은 무음 상태다. 한국과의 12시간 시차로 한 밤 중에 걸려오는 070 전화 때문에 언젠가 밤잠을 설치고 나서 모든 소리 알람을 껐다. 낮 시간 동안에는 항상 스마트폰을 보이게 놓아두기 때문에 별 문제없다.
DAP Aerovias에서 날아온 메시지다.
20:10 출발 비행기가 13:00 출발로 계획이 변경되었으니, 11:30까지 공항으로 나오란다. 문제가 있으면 전화를 하라고. 아니면 환불 받든 지. 고객의 권리에 대한 내용을 참조하라고. 그때 시각이 10:50이었다. 카페에서 공항까지는 5km 정도인데, 문제는 푸에르토윌리엄스에는 택시나 우버가 없다는 것이다. 보통 묵고 있는 숙소 주인이 필요한 이동을 유료나 무료로 제공한다. 저녁까지 기다릴 것 없이 일찍 섬을 탈출한다니 좋기는 한데, 당장 공항으로 이동할 교통편이 없다. 알투르가 배를 타고 나갔으면 당연히 전화가 안될 테고, 트리스탄의 전화번호를 저장하지 않은 것이 큰 실수다.
비행기 출발 시간이 늦어지는 것은 많이 보았지만 출발이 무려 7시간 10분이나 앞 당겨지고, 그 사실을 출발 2시간 20분 전에 이메일과 문자 메시지로 알려주는 경우 난생처음이다. 일단 알투르가 못 볼 것을 알지만 메시지를 보내고, 카페 주인장에게 문제를 설명하니 지인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찾아보겠단다. 이렇게 황당할 수가. 20분 내에 차편을 마련하지 못하면 오늘 섬을 탈출하지 못할 수도 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렇게 10분이 흘렀을까? 오늘 비행기 못 타면 푼타 아레나스에 예약한 호텔은? 푸에르토윌리엄스에서 하루를 더 자야 한다면 어디서 자지? 통나무집에 가서 또 자기는 싫은데. Errante Ecolodge에 200불 내고 자야 하나? 방은 있을까? 짐을 또 풀어야 한다고? 내일은 비행기 좌석이 보장될까? 온갖 상념이 머리를 맴도는 시간이다.
Traveler가 아니고 Wanderer라며. 계획이 좀 틀어지는 것은 당연한 거 아녀?
알투르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온다고. 알투르가 일 나갔다가 돌아와 스마트폰 충전하려다가 내 메시지를 보았단다.
할렐루야!!!
Diego de Almagro 호텔에 체크인했다. 마젤란 해협에 면한 8층 호텔이다. 푼타아레나스에서 손꼽는 고급호텔이다. 바다뷰는 100불, 도시뷰는 90불이다. 좀 무리하며 2박을 예약한 이유는 Almagro 호텔 체인은 수영장과 사우나가 있다. 코이헤이크에서 경험했다. 마젤란 해협을 이미 지겹게 보았는데 혼자 자면서 바다뷰는 무슨, 도시뷰를 예약했다. 그런데 8층 꼭대기층의 끝방 코너뷰를 배정해 준다. 코너 양쪽에 큰 창문이 있다. 마젤란 해협부터 도시 전체가 보인다. 침대의 위치와 방향도 마음에 든다. 사우나해야지!!! 통나무집에서의 7박을 보상받는 기분이다.
이렇게 좋을 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