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드는 어르신

치료는 불가능하지만 관리는 가능한

by 재거니

이즈음 네댓 시간 자고 나면 저절로 눈이 떠진다. 어떤 날은 3시간 자고 깨는 날도 있다. 자정에 잠자리에 들면 새벽 다섯 시 전에 눈이 떠진다. 나이 들면 새벽잠이 없다고 예전에 누가 그랬는데, 그 당시 난 믿지 않았다. 7시간 내지 8시간을 길게 자던 때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5년 전에 양압기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수면시간이 6시간 정도로 줄었다. 이즈음 그 시간이 더욱 줄었다. 네댓 시간 정도 자는 날이 많아졌다.


8년 전이다.(내 브런치를 뒤지면 언제인지 확실하게 안다)

3년 선배가 뜬금없는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왔다.( https://brunch.co.kr/@jkyoon/179 )

선배: 요즘은 어디서 놀고 있냐?

나: 어제 저녁에 케이프타운 도착했어.

선배: 잘도 돌아다닌다. 걱정도 없구나.

나: 걱정한다고 모가 달라져야 말이지...ㅎㅎ

선배: 팔자 좋다.

나: 어디 있어? 이 시간에... 한국은 새벽 네신데.

선배: 집. 잠을 못 자.

나: 잠 안 오면 공부하든지 어려운 책 읽어! 요새 사피엔스나 호모데우스 좋더구먼...

선배: 걱정 없이 다니는 네가 부럽다.

그 당시는 새벽에 깨서 잠 못 드는 어르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잠이 안 온다는 것은 명료한 정신으로 책을 읽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에 나는 너무 오래 길게 잘 자던 시절이었다.


가고시마 4박 5일 여행 중이다. 새벽 아니 한 밤 중인 2시에 눈이 떠졌다. 10시경에 잠이 들었으니 4시간 잔 것이다. 오래전에 약속한 여행이라 목감기가 있음에도 무릅쓰고 떠났다. 감기약을 먹고 잤는데 악몽(이즈음 꿈은 전부 악몽이다)을 꾸다 잠이 깼다. 다시 잠들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신이 너무 명료하기 때문이다. 줄리언 반스의 책 'What has left will not return.(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을 폈다. 반쯤 읽은 책을 이런 상황을 대비해 가방에 넣고 떠났다.


여행 중에 책을 읽는다는 것에 의아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책을 읽는 것은 집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데, 돈 들여 떠난 여행 중에 책을 읽다니 바보 아냐? 하나라도 더 보고, 하나라도 더 먹고, 동반자들과 수다 떨며 시간을 보내야지. 책을 읽고 있을 시간이 있다니 정신이 좀 이상한 거 아냐?'하고...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면 머릿속의 뇌가 다른 상태가 된다. 습관적인 일상이 아니라 약간 긴장(?)한 스탠바이 상태를 난 느낀다. 오감이 다 약간 들뜬 상태가 된다. 주변의 모든 상황이 다 신기하고 새롭다. 느끼고 음미하며 생각을 다듬어 행동해야 한다. 이 상황에서 책을 읽으면 책의 내용에 모든 감각이 집중된다. 행간에 저자가 숨겨놓은 의미가 보이기도 하고, 소설의 반전이 나름 예상되기도 한다. 읽기의 즐거움이 더 배가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행도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한다. 여유가 있어야 책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이 하이브리드라고 했다. 소설(fiction)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회고록(nonfiction)의 성격도 있기 때문이다. (치료는 불가능하지만 관리는 가능한) 혈액암 진단을 받은 78살의 저자(줄리언 반스)의 마지막 소설이라고 했다. 죽음을 앞둔, 죽어가는 저자의 서술이 너무나 절절하게 내게 다가온다. 평생의 기억이 자신의 정체성이다. 밀려오는 기억(involuntary autobiographical memory)들 속에서 어느 것이 변형되지 않은 사실인지를 구별하는 의식이 어르신이 되어버린 내게 묘한 공감을 준다. 저자의 시니컬한 은유와 솔직한 고백에 자주 공감의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재미있지만 두 시간 정도 지나자 눈이 피곤함을 느낀다. 책장을 덮고 다시 잠을 청했다. 아직 끝내지 못했다는 것이 위안이 된다. 달달한 초콜릿을 먹다가 남겨둔 느낌이랄까? 새벽 아니 한밤 중에 책을 읽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아직 읽지 못한 줄리언 반스의 책이 20권 정도 있다는 것이 내게 새로운 의욕을 불러일으킨다.


줄리언 반스의 소설을 다 읽고 죽어야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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