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소설가 줄리언 반스의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의 원 제목이다.
소설 속의 화자 닐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준 교수의 이름이 'Elizabeth Finch'다. 읽기 어려운 소설이다. 서구 문명에 절대적 영향을 준 기독교와 그에 파생된 많은 이야기들이 내가 처음 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옮긴이가 과연 이 모든 이야기를 다 이해하고 번역하였는지 의심이 간다. 옮긴이도 한국사람이기 때문이다. 번역이 엉터리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학식이 높고, 영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한다 하여도 서구 문화와 문명을 영국 지식인처럼 알 수는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줄리언 반스가 부커상을 수상할 만큼 훌륭한 소설가라 서구 문명의 본질을 완전히 통찰했는지를 확인할 수는 없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진실이거나 사실일 필요 없다. 그냥 이야기일 뿐이다. 줄리언 반스는 엘리자베스 핀치라는 교수를 통하여 자신이 하고 싶은 또는 상상할 수 있는 생각을 독자들에게 마구 (거리낌 없이) 던질 수 있다. 왜? 소설이기에... Fiction! 소설이 갖는 자유로움이다. 그런 자유를 누리며 호구를 해결할 수 있는 소설가들이 솔직히 부럽다. 그 부러움이 나도 소설을 쓰고 싶다는 욕구를 생기게 한다.
재미있는 소설이 아니다. 어쩌면 유한한 시간(인생)을 가진 인간들에게 읽을 가치가 없는 소설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읽기를 시작하면 웬만해서는 중간에 포기하지 못하는 내 성질이 결국 끝을 본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소설 속의 인물들과 나를 비교한다. 그리고 한동안 침묵한다.
적당한 행복에 적당히 만족하라. 인생에서 유일하게 분명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건 불행이다. [괴테]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고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다.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일을 하면, 성격상 자유롭고 방해가 없고 막힘이 없다. 반면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일을 하면, 약해지고 속박되고 방해받는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인정해야만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일은 우리의 몸, 우리의 소유, 우리의 평판, 우리의 공직이다. [에픽테토스]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일에 우리의 몸이 포함된다는 것에 격한 공감이 간다. 노화와 죽음을 어떻게 해볼 수 없다.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일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삶이 안달하는 삶이다. 더 이상 안달하며 살고 싶지 않다. 이 생각을 다시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내게 의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