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나를 나답게 만드는

by 지한

진짜 다 때려치우고 싶은 때가 있었다. 집 안 온통 빨간딱지에 매일 일해서 갚아도 줄지 않는 빚, 찾아와 독촉하는 빚쟁이 들까지. 뭔가 막다른 길에 몰려 있는데 그 앞을 촘촘히 누가 지키고 있는 느낌이었다. 조금 틈이라도 있으면 어찌 도망쳐 볼 텐데 앞이 보이지 않았다. 빠져나갈 수 없었다.


그래도 우리 가족은 나무 같이 서 서로를 지키고 있었다. 빚쟁이들이 오면 동생과 나는 엄마 앞을 막아서고 대신 맞은 날도 있었다. 그럼 또 엄마는 우리 앞을 막아서 지켰다. 힘든 순간이지만 부모님은 우리를, 나는 동생을 동생은 나를 그렇게 서로를 걱정했다. 울던 날도 있었지만 덕분에 우리 모두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때였다. 대학교를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동생은 고등학생이었다. 동생의 심정은 어땠을까. 작은 아버지로 인해 온 집 안에 가압류 딱지가 붙고 빚쟁이들이 집 문을 두드릴 때,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할 시기에 학원 하나 가지 못 하고 나처럼 어딘가 막다른 길에 몰려 혼자 말 못 하고 좌절하고 힘들지 않았을까. 뭐라도 해주고 싶었다. 막다른 길에서 혼자 서서 아프길 바라지 않았다. 원래부터 가만히 있는 성미가 아니었기에 더 주저앉아 있을 수 없었다. 형이니까 너무 사랑하니까. 나답고 싶었다. 일 하고 싶어 하던 동생을 주저앉히고 아르바이트로 빚을 갚는데 보태면서 미안함에 동생 용돈과 문제집 살 돈을 책임지기로 했다. 동생은 헛소리하지 말라며 나를 말렸지만 결국 내 말을 들어줬다. 같이 울었던 것 같다. 미안하다고 서로가. 참 바보같이. 막다른 길에 몰려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빛 하나 보이지 않던 벽을 숟가락으로 파고 파고 나니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빚을 갚느라 기억도 안나는 대학생활을 보내고 군대를 다녀왔다. 내 삶은 스스로 보기에 비루하고 평범조차 하지 못하다 생각했지만, 가족들은 언제나 내 곁에서 한결같이 자랑스러워하고 응원해 주었다. 대학교에 가더라도 빚 때문에 등록금을 못주니, 갈지 말지는 알아서 하라던 아버지도 학사모를 씌워드린 순간 "그럴 줄 알았다. 네가 우리 집에서 머리는 제일 좋아. 할 거라 믿었다." 하시며 웃으며 안아주셨다. 아마 본인이 다 못한 학업에 대한 한 때문에 더 그랬을 테지만, 또 가슴 한편에 제대로 뒤바라지 해주지 못한 미안함에 조금 더 담담히 말씀하셨지만 그 웃음이 좋았다. 갑자기 떠오른다 그 얼굴이. 어머니는 언제나 그렇듯이 "네가 내 아들이라서 자랑스럽다." 하시며 "대학을 졸업했다. 좋은 데 취직했다." 장을 보러 시장에 갈 때마다 늘 사람들에게 소개하시며 자랑하고 사랑받게 해 주셨다. 동생은 내 버팀목이었다. 고민 끝에 동생은 전문대학교에서 IT 기술을 배우기로 했다. 지금 보니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우리는 서로 보고 웃으며, 가끔 동생이 말한다. 긴 터널을 통과해 같이 여기까지 왔다며. 고맙다 했다. 나는 너 때문에 버텼는데. 고마운 건 난데. 누구보다 열심히 살 수 있게 해 준 게 너인데 넌 모르겠지. 사랑하는 동생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내 앞에서 "잘한다." 하며 칭찬 한 번 해주시지 않던 엄한 아버지는 고모들과 고모부들을 만나실 때면 어려서부터 받아 온 성적 자랑에 돈 한 번 대주지 못한 놈이 서울 대학에 합격해서 혼자 힘으로 다닌 이야기로 자랑하기 일쑤셨고, 취직을 했을 때는 유명한 외국 회사에 취직했다고 또 자랑스러워하시며 늘 귀에 딱지 앉도록 이야기하셨단다. 나는 아버지가 그렇게 생각하는지 몰랐다. 치. 한 번만 해주시지 한 번만 잘했다고. 기다렸는데. 늘 인정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칭찬 한 마디가 어려웠다. 그런데 내 앞에서만 빼고 늘 자랑스러워하셨다고 한다. 내가 교만해질까 봐. 안주하게 될까 봐. 고모가 말했다. 널 너무 사랑했다고. 아빠가 잘 못한 게 많아서 더 곁에 못 가고 응원만 했다고. 잘되길 바라고 잘되면 누구보다 좋아서 자기한테 달려와 자랑했다고. 눈물이 났다. 미웠지만 좋았다. 보고 싶었다.


이 사람들이 지금도 여전히 나를 가장 나답게 한다. 아들로 형으로, 지친 직장인으로 집으로 돌아오면 언제라도 따스히 안아주고 다시 일으켜 세운다. 네가 최고라며 응원해주며 수고했다 토닥여주는 따뜻함이 힘든 세상을 힘내어 살아낼 수 있게 해 준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진상 손님, 갑질 클라이언트 등 힘든 순간에도 언제나 돌아가 따뜻이 안길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된다. "이 사람들아! 나도 집안에 귀한 아들이야." 하며 한 번 욕하고 웃으며 넘어갈 수 있게 해 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게 있다. 이 기회를 빌어 말해야겠다. 엄마, 동생아. 고마워. 아빠. 하늘에서 보고 있지. 이제 미안해하지 마 아빠가 그래도 잘 키워줘서, 시련 속에서 조차 우리는 모두 더 단단해졌고 잘 살아요. 행복하게 잘 지내세요.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