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바람 한가득 담고 돌아오다
나는 하늘을 날고 싶었다.
대학생 시절 내 꿈은 승무원이었다. 여행을 좋아하고 서비스업이 적성에 맞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승무원이야말로 딱 어울리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유니폼을 입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캐리어를 끌며 당당하게 걷는 내 모습을 상상할 때마다 가슴 뛰게 설렜다.
처음에는 크게 내키지 않아 하시던 부모님을 설득해 승무원학원도 등록하고, 영어 공부, 면접 준비, 그리고 체력 단련 및 체중 감량을 위해 운동과 다이어트도 열심히 했다. 대학 졸업반 시기에는 국내 대표 항공사에 지원도 여러 번 했고 면접과 실기시험도 몇 번 봤지만 늘 최종 문턱을 넘지 못했다.
내가 승무원 준비 중인 걸 아는 가까운 친구들은 너는 딱! 승무원 체질이라며, 너를 안 뽑으면 누구를 뽑겠냐고 격려를 해줬고, 학원에서는 학원 광고물에 실릴 사진 모델로 나를 쓸 만큼 전적으로 가능성을 믿어 주셨는데, 뭐가 부족했는지 늘 마지막이 문제였다. 최종에서 몇 번 떨어진 후, 졸업 후에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라며 지원했던 항공사 면접에서 또 떨어지고 나는 그날 또 한 번 펑펑 울고 그다음 날 놀라울 만큼 깔끔하게 마음을 접었다.
'이 길은 내 길이 아닌가 보다!'
졸업은 했고, 어디라도 취직을 해야 했다. 온 관심과 신경을 승무원 하나에만 두고 몇 년을 보낸 터라 항공사가 아닌 다른 회사에 대한 정보나 준비가 많이 없는 상태로 급하게 후반기 채용 공고에 몇 군데 지원서를 냈고, 그중 한 군데에 덜컥 합격을 했다. 제약회사 영업부서.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나와 너무 맞지 않는 곳이라고 걱정을 했다. 그렇지만 나는 당시 승무원이 아니면 뭐든 다 의미가 없다는 조금은 철없는 마음이라 이곳이 아니어도 딱히 마음을 주고 싶은 곳이 없었고, 무엇보다 백수인 상태로 더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입사를 마음먹었다. 아빠도 마음이 편치 않으신 듯했다.
입사가 결정된 후 첫 출근 3일 전, 아빠가 처음으로 단 둘이 저녁을 먹자고 데이트 신청을 하셨다. 집 근처 피자집에서 만나 피자 한 판을 앞에 놓고 아빠가 말씀하셨다.
"J야, 회사 생활 자체도 처음이라 힘들겠지만, 제약회사 영업직은 특히 쉽지 않은 일일 텐데 할 수 있겠니?"
"응 아빠, 다들 그렇게 얘기하는 데 나 해볼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자신이 있었던 건지, 아니면 관심이 없었던 건지, '하면 하지 못할 게 뭐 있어'하는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대답했다.
"알았다. 그렇다면 이것만 명심하렴. 어차피 신입은 아무것도 모르는 게 정상이야.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어. 못하고 실수하면서 배우는 게 당연한 거지만, 그래도 회사에서 예쁨 받으려면 절대 지각하지 말고 열심히 배우려는 자세로 너의 성실함을 보여주면 선배들도 많이 가르쳐줄 거다.”
2007년 11월, 나는 아빠의 우려와 조언을 가슴에 새기고 첫 출근을 했다.
입사 후 첫 한 달은 동기 30여 명과 교육을 받았다. 회사일에 대한 전반적인 교육과 회사 제품에 대한 교육은 물론이고, 매일같이 각종 질병의 증상, 치료, 효과, 부작용 등의 내용을 배우고 생전 처음 들어보는 영단어를 하루에도 수십 개씩 외웠다.
며칠에 한 번씩 시험이 있었고, 나는 한 달 후 입사 교육을 1등으로 수료했다. 입사 동기 대표로 사장님께 수료증과 배지를 받았고, 그다음 월요일 나는 성적이 좋았던 남자 동기 몇 명과 함께 종합병원 부서로 배치됐다. 약국이나 개인병원이 아닌, 종합병원 부서로 배치된 여자는 내 동기 중 나 혼자 뿐이었다. 시작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업무를 시작하니 현실은 달랐다.
우선 일이 내 적성에 너무 맞지 않았다. (다들 우려했던 바인데, 왜 나만 그걸 몰랐을까?) 동기들과 교육할 때는 그래도 서로 으쌰 으쌰 하는 동기 사랑이라도 있었는데, 팀의 막내가 되어 일을 시작하니 어렵고 이해 안 되는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를 정말 힘들게 한 스트레스 요인은 다른 데 있었다.
1. 군대식 문화
우선 회사 문화가 유독 딱딱한 군대식이어서 인사도 '안녕하세요'가 아닌 '안녕하십니까'라고 하도록 배웠는데, 이런 '다나까' 문화는 여중, 여고, 여대를 나와 주로 여자들과 어울렸던 나에게는 특히 적응이 안 되는 문화였다. 군기, 상명하복 등 군대식 용어를 이때 제일 많이 접했다.
2. 잦은 회식
회식 자리는 늘 힘들었다. 일단 잦은 회식 자리도 어렵고 불편했지만, 나는 술을 못 하시는 아빠 체질을 그대로 물려받아 술을 전-혀 못 하는데도 불구하고, '선배 혹은 상사가 주는 술은 거절해서는 안된다'며 강권하는 회사 분위기 때문에 술을 억지로 마셔야 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나는 나름대로 마시는 척하다가 뱉어내거나 하는 등 살아남기 위해 요령을 배워 나갔지만, 보는 눈이 많아 요령을 피우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강제적으로 술을 마셔야 하는 그 시간도 괴로웠지만 어찌 보면 그보다도 힘들었던 건 이런 문화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왜 모든 회식에는 술이 함께여야 하는지,
왜 못 마시는 술을 억지로 받아 마셔야 하는지,
왜 이런 비합리적인 문화가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는지...
나는 체력도 약한 편이라 퇴근 후에는 바로 집에 와서 쉬어야 다음날 생활이 수월한 사람이었는데, 특히 주중에 회식이라도 있는 날이면 그날은 몸과 마음이 괴롭고, 다음날은 체력이 달렸다.
2008년 여름, 입사한 지 반년이 훌쩍 넘었지만 나는 여전히 회사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하루하루를 힘들게 그저 버티고 있었다.
'여행 다닐 돈 벌려고 회사 다닌다'는 말, 많은 이가 공감할 것이다. 나 역시 어릴 때부터 여행을 좋아하던 터라 여기저기 기회만 되면 많이 다녔는데, 이번에는 회사 다니면서 돈도 좀 벌었겠다, 스트레스도 많이 쌓였겠다, 여름휴가는 제대로 즐기고 오고 싶었다. 그래서 택한 곳이 뉴욕.
뉴욕은 언젠가 한 번은 가보고 싶던 곳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당시 뉴욕에서 공부하며 살고 있던 친한 동생이 있어 더 쉽게 뉴욕행을 결정했다. 우리는 어릴 때 동네에서 만나 쭉 알고 지낸 사이로 거의 자매와 다름없는 사이였는데, 일주일 가량 그 동생 집에 머물면서 옛 추억도 나누고 정말 하루하루가 지나가는 게 아까울 정도로 소중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여행 막바지쯤 우리는 전형적인 '미국 느낌'이 팍팍 나는 'Juniors'라는 체인 레스토랑에 저녁을 먹으러 갔다. 금발머리, 파란 눈, 영어로 둘러싸인 그곳에서 나는 마치 내가 잠시 현실을 벗어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그런 곳이라면 조금은 허황된 꿈을 꿔도 될 것만 같았다.
"K야, 사실 언니 이런 데서 살면서 영어도 배우고 사람도 많이 만나는 게 꿈이었어."
이렇게 비현실적인 '꿈'이라도 잠시나마 꿀 수 있다는 게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찰나 그 동생의 너무나 간결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해 언니, 뭘 망설여"
너무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내가 외국에서 지내보는 게 꿈이라는 얘기를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안 해본 게 아니었는데, 언젠가 그런 날이 오지 않겠냐고 막연한 희망을 주는 말을 하는 친구는 가끔 있었어도, 그게 꿈이면 그냥 하면 되지 않겠냐고 이렇게 쉽게 얘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까지 나는 꿈은 그냥 꿈인 채로 갖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동생의 한 마디가 마치 왜 내 꿈이 그저 꿈이어야만 했는지, 왜 실현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를 반문하는 것 같았다.
"언니가 그렇게 원하는 일이면 못 할 이유가 뭐야?"
"아니, 나는 이제 나이도 있고,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한 얘길까?"
"언니 나이가 뭐 어때서? 언니 늦은 거 아니야 절대. 지금이라도 충분히 할 수 있어."
굉장히 오랜만에 설레는 기분을 느꼈다. 누군가 진심으로 응원해주는 것만으로도 왠지 내 꿈에 한 발짝 다가간 것 같아 가슴이 뛰었다. 그렇게 나는 가슴에 바람을 한가득 담고 한국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