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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Lee Dec 01. 2023

어머 손님, 그런 사이즈는 없어요


고3 수능을 마치고 대학 입학을 기다리던 때였다.


엄마는 "대학생이 되면 정장바지 하나는 있어야 한다"며 나를 백화점에 데려가셨다. 여러 매장을 둘러보며 원하는 옷을 찾는데, 가격도 저렴하며 핏도 괜찮은 옷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들어간 어느 매장.


직원이 건네준 바지를 입어봤는데 수험 기간 늘어난 살로 66 사이즈가 맞지 않았다.


"이거 77 있어요?"

엄마가 묻자 그 직원 언니는 황당하다는 듯 눈을 똥그랗게 뜨고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어머 손님, 그런 사이즈는 원래 없어요.



너무 부끄러웠다. 나는 늘 내가 표준체형이라고 생각했었고, '고3 수험살'이 조금 붙었다 해도 백화점에서 맞는 사이즈를 못 찾을 정도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때 내 표정이 변한 걸 눈치챈 엄마가 잽싸게 나를 그 매장에서 데리고 나왔다.


바지 하나 사주겠다고 왔는데, 내 예쁜 딸한테 맞는 사이즈가 없단다. 그런 사이즈는 원래 안 들어온단다.


출처: unsplash.com


결국 우리는 숙녀복이 아닌 여성복을 파는 층으로 올라갔다. 중년층 이상이 주 고객인 매장들이라 77 사이즈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빅사이즈 바지를 피팅해 보러 들어간 그 작고 어두운 공간에서, 내내 참고 있던 눈물이 기어이 터지고 말았다.


그 뒤로 헬스장을 다니며 살을 꽤 뺐지만, 나는 나에게 모욕감을 줬던 그 매장에 다시는 가지 않는 것으로 소심한 복수를 했다.


"어쩌죠? 저희 옷이 조금 작게 나왔나 봐요, 죄송하지만 찾으시는 사이즈는 없네요"라고 조금 배려해서 말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열아홉 살 소녀에게 "그런 사이즈는 원래 안 나온다"는 얘기는 너무나 큰 충격이자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상처가 되었다.




재작년, 캐나다의 한 쇼핑몰, 한 매장 쇼윈도 앞에서 발길이 멈춘 적이 있었다.


속옷과 비키니 등을 파는 매장이었는데, 모두에게 친숙한 빼빼 마른 마네킹 옆, 조금 살집이 있는 마네킹이 유독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다양한 사이즈를 판매 중이라는 사인도 있었다.


XS to XXL
32A to 42E


지난여름 런던 여행 중에는 여러 매장에서 플러스 사이즈 마네킹을 만났다.


아디다스와 나이키의 모델이 그랬고, 심지어 나이키에는 배가 볼록 나온 임신부 모델도 있었다.



다양성이 별 건가.


44/55 모델 사이즈에 내 몸을 맞추는 게 아니라, 66/77/88 내 사이즈에 맞는 옷을 어렵지 않게 찾아 입을 수 있는 것.


사람 몸이 다 다를진대, 다 똑같이 빼빼 마른 마네킹으로만 쇼윈도를 채운 게 아니라, 플러스 사이즈도 충분히 예쁘게 피팅해 입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앞으로는 더 많은 매장에서 다양한 모델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표지 사진: Body positive model, Ashley Graham & her sister, Abigail

출처: Fashion Gond Gone R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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