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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Lee Apr 02. 2022

자네, CPA 해 볼 생각 없나?

긴 여정의 시작


처음 회계사의 진로를 생각해 보게 된 건 엉뚱하게도 캐나다에서 대학원 수업을 듣고 있을 때였다.


당시 나는 국제관리/국제경영 대학원을 다니는 중이었는데, 10개가 넘는 과목 중 회계와 재무 수업이 하나씩 포함되어 있었다.


회계 수업을 하는데 같은 반 친구들이 헤매는 게 보였다. 딱히 어려운 개념이 아닌데도 잘 이해를 못 하는 것 같았다. 돈이 들어오고 나가는 걸 대변, 차변에 기록하고, 돈의 흐름을 현금흐름표로 만드는 등 간단한 문제풀이를 하는데도 자꾸 막히는 듯했다.


그들이 특별히 숫자에 약하거나 나보다 덜 똑똑해서가 아니었다. 개 중에는 엔지니어 출신의 아주 똑똑한 친구들도 있었다.


회계사를 하려면 수학을 잘해야 하나요?

제 대답은 "No"입니다. 회계사 시험에 미적분, 삼각함수 이런 거 안 나오거든요. 사칙연산만 할 줄 알면 되는데 심지어 웬만한 계산도 엑셀이 다 해줍니다.

다만, 숫자에 대한 거부감은 없어야 합니다. 숫자에 대한 감각이 있고,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또 간단한 수식 정도는 세울 수 있어야겠죠. 엑셀이 계산은 해 준다고 해도 그 수식을 넣는 건 사람이니까요.


자연스럽게 그 친구들을 수업 시간이나 쉬는 시간을 통해 도와주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교수의 눈에 띄었다.


교수님이 일부러 나를 지목해서 "J, 이건 네가 한 번 설명해 보겠니?" 하면 심지어 내가 "네, 1 더하기 1은 2입니다!" 식의 (내 기준엔) 별로 대단하지 않은 대답을 해도 "오, 역시 제대로 이해했구나!" 하는 칭찬과 격려가 돌아왔다.


그다음 학기에는 재무 수업이 있었다. 사실 재무는 회계와 결이 전혀 다른 수업인데도, 'J는 숫자에 강하다'라는 이미지가 한 번 대입되자, 나 역시 '나는 숫자로 하는 건 뭐든 자신 있어' 하는 (지금 생각하면 사실과 많이 다른) 자신감 뿜뿜인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 결과 재무 교수 역시 나를 좋게 봤다.


당시 재무를 가르쳤던 교수님은 CPA와 CFA를 모두 갖고 있는 능력자였고 교수가 되기 전엔 Big4 회계법인에서 오래 일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CPA (Chartered Professional Accountant 혹은 Certified Public Accountant):
공인회계사

CFA (Chartered Financial Analyst):
공인재무분석사


어느 날 수업 전에 이런저런 얘기를 가볍게 나누고 있는데, 대뜸 교수님이 "J, 너 대학원 졸업 후 CPA 해 보는 것 어때?" 라며 툭 던지는 것이 아닌가. 마치 "오늘 저녁은 된장찌개 어때?"처럼 가볍게.


CPA?? 지금 이 나이에? 너무 늦지 않을까요?

이제 막 대학원에서 조금 덜 허덕이는 법을 겨우 터득했는데, CPA라니요. 공부를 몇 년을 더 하란 겁니까.


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그날 저녁 퇴근해 온 신랑한테 가볍게 물었다.

"자기야, 글쎄 오늘 우리 재무 교수님이 뭐라고 하는 줄 알아? 나보고 CPA를 해 보래.ㅎㅎ"


늘 내 공부와 성장 기회에 두 손 들어 지지를 보내던 신랑이었지만, 이미 외벌이 생활이 몇 년째 지속되고 있었고, 학자금 대출 및 모기지 상환 등으로, 신랑도 사실은 내 대학원 졸업을 누구보다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산 넘어 산이라고, 또 몇 년을 더 공부해야 할지 모르는 길에 들어서겠다는 말에 조금은 주춤거려도 전혀 이상하거나 섭섭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 예상과는 너무나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


"CPA? 오, 나는 찬성! 네가 원하면 해 봐."

"그거 쉬운 길 아니야.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고... 또 합격한다는 보장도 없어. 솔직히 대학원까지도 생각 못했는데, 여기까지 지원해 준 것만도 나 너무 고마워. 진심이야. 더 하는 건 내 욕심인 것 같아."


그랬더니 신랑이 잠시 생각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J야, 나는 사실 '공부머리'가 없어. 그래서 학창 시절에 성적이 좋거나 하지 않았다는 거 너한테도 말했지? 하지만 너는 다르잖아. 너는 가능성이 있어. 또 너는 뭐든 마음먹고 시작하면 얼마나 열심히 하니?


무조건 공부를 하라는 게 아니야. 지금 네 현상태가 부족하다는 얘기는 더더욱 아니고. 하지만 해 보고 싶은 도전이라면 나는 할 수 있는 만큼 해 봤으면 좋겠어, 나중에 후회 없게. 우리 빚은 천천히 갚자."




단지 신랑이 지지한다고 그날 바로 쉽게 결정을 내린 건 물론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적극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나는 아마 미안해서, 또 자신이 없어서, 시작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사실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당시 대학원을 다니며 내 속 깊은 곳에 있던 공부에 대한 갈망이 몽글몽글 솟아오르던 때라, 이 열정이 사라지기 전에 더 공부를 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결국 대학원 졸업과 동시에 CPA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긴 여정이 내 앞에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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