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세금 모르는 회계사
얼마 전, 뒤늦게 드라마 <굿파트너>를 보며 생각했다.
나는 변호사는 못할 것 같다고.
극 중 신입변호사 역할로 나오는 '한유리', 의뢰인에게 최선의 선택을 안겨주기 위해 매일같이 고민하지만 가끔은 감정이 앞서는, 그리하여 그녀의 진심이 어떨 땐 오지랖으로 변질되는 그런 캐릭터.
진심보다는 효율을, 감정보다는 이성을, 정의보다는 수익성을 강조해야 하는 그런 세계를 보며, '아, 나는 변호사는 못하겠다'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최근에 본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보면서는 환자 하나하나 진심을 담아 챙기고, 그로 인해 힘들어하는 '정다은'이라는 캐릭터를 보면서, '후아… 나는 간호사는 못하겠다' 생각했다.
예전에 <유퀴즈>를 보던 중 장례지도사나 장기이식 코디네이터 같은 직업군을 보면서도 '아, 나는 저런 일은 못하겠다' 생각한 적도 많았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도, 여전히 감정이 이성을 이기는 날이 너무 많은 나로서는 감정을 배제하고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일상을 견디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9년 전, 한 회계법인의 감사팀으로 입사했다.
감사팀은 원래 세무 업무는 하지 않지만, 2년 차 되던 해 연말정산 시즌, 세무업무를 담당할 보충인력을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자원한 적이 있었다. 늘 배워보고 싶은 일이었기에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시즌이 되자 각종 서류와 증빙자료가 들어간 연갈색 서류봉투가 사무실 한켠에 넘치도록 쌓였다.
나한테 할당된 서류 봉투를 열고 내용물을 점검하다 보면, 얼굴도 모르는 고객의 신상, 가족관계, 연봉, 각종 수입 및 지출 내역 등 많은 것들을 보게 된다.
하지만 제한된 시간 안에 워낙 많은 양의 서류를 다루는 업무기 때문에 빠르면서도 정확한 일처리가 필요한 자리였다. 꼼꼼하게는 보되 감정을 실을 필요는 없는, 다소 기계적인 과정이라 여겨지는 날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두툼한 한 서류 봉투 안에서 꼬깃꼬깃 접힌 영수증 뭉치 하나가 나왔다. 연세가 꽤 있으신 한 고객의 파일이었는데 그건 모두 요양원에 계신 아내분을 위해 구입한 '성인 기저귀 영수증'이었다.
그 영수증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들여다보는데 갑자기 한국에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빠짝 마른 할아버지와 쪼그라든 할머니 모습을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어느 날은 어떤 할머니 고객의 서류를 검토하던 중이었다. 전년도와는 다르게 배우자분의 기록이 빠져 있어 서류가 혹시 누락됐나 싶어 다시 살펴보니 ‘앗, 할아버지 돌아가셨네...ㅠㅠ‘
그렇게 일하다 말고 혼자 뿌에엥 거리길 몇 차례…
감정을 배제하기는커녕 이 사람에도 감정이입, 저 상황에도 감정이입, 이 꼴을 하고 있으니 도대체 일이 진행이 안 됐다.
그리고 알았다. 개인 세무 업무는 나랑 안 맞는다는 걸. 그리고 그다음 해 나는 세무 업무에 자원하지 않았다. (물론 그쪽 파트너도 나를 원하지 않았겠지만 ㅋ)
자칭 '공감력 만렙'인 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공감력을 일터에서만큼은 쓸 일이 별로 없었으면 좋겠다. 낙엽 떨어지는 것만 봐도 눈물이 나는 나같은 '유리멘탈 개복치'같은 인간에게는 별 게 다 울 이유가 되므로.
그런 의미에서, 감정과 싸우는 대신 하루 종일 숫자와 씨름하면 되는, 이렇게 내게 꼭 맞는 일을 찾은 게 정말 어찌나 다행인지.
회계사 되길 정말 잘했다.
*관련있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