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Lee Apr 09. 2022

회식자리에서 예절도 모르는 사람이 됐다

전무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취직한 지 한 달도 안 되었을 때 일이다.


입사 후 첫 한 달은 동기들과 교육을 받았다. 교육이 끝나가는 시점에, 회사 전무님이 신입 사원들을 위한 단체 회식 자리를 마련했다. 입사 면접 때 딱 한 번 뵙고 그 뒤로는 마주칠 일이 없던 분이었다.


회식 당일날 교육 일정을 마치고 30여 명의 신입사원이 모두 회식 장소에 모였다. 회사 앞 고깃집에 가 보니 예약된 테이블에 주르륵 세팅이 완료되어 있었다.


우리끼리라 긴장을 좀 풀고 있다가, 비서와 함께 들어오는 전무님을 보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후다닥 일어나 90도로 인사를 했다.


나는 전무님과 꽤 거리가 있는 테이블 쪽에 앉아 있어서, 나름 편하게 동기들과 수다를 떨며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가만히 보니 마치 다들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 명씩 전무님한테 가서 소주를 한잔씩 따라 드리고 또 따라 주시는 술을 받아 마시는 것 아닌가.


그때까지 나는 이런 술자리 경험이 별로 없던 터였다. 대학생 시절 가끔 동문회 등 단체 모임에 가보긴 했지만, 다들 언니 오빠 하는 편한 사이라, 엄격하게 주도(酒道)를 지켜야 하는 어려운 자리가 아니었다.


내가 이런 자리를 유독 어려워한다는 걸 아는 친한 동기 오빠가 옆에서 나를 챙겨줬다.


"J야, 너도 가서 술 한잔 따라 드리고, 따라 주시면 받아 마시고 와. 열심히 하겠다 인사드리고."


"그냥 가서 그렇게만 하고 오면 되는 거예요?"


"응, 격려 말씀해 주시면 공손하게 듣고, 그러다 말이 어느 정도 끊겼다 싶으면 눈치껏 인사드리고 네 자리로 돌아오면 돼. 그게 다야, 어려울 것 하나 없어... 지금 전무님 옆자리 비었다! 지금 얼른 가!"


나는 그 동기 오빠의 코칭대로 소주잔 하나와 반 정도 남은 소주병 하나를 들고 전무님 옆에 가서 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세요 전무님, 이번에 입사한 OOO이라고 합니다. 제가 한 잔 따라 드리겠습니다."


전무님이 웃으며 잔을 내미셨다.


그런데 술을 따라 드리는 그 순간, 전무님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게 어디서 배운 버릇이야!!!"


나는 숨이 턱 막히며, 그 짧은 시간에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는지 빠르게 머리를 굴려 봤다.

무릎을 꿇고 있었고, 한 손으로 병을 들고 있었지만, 다른 한 손은 병에 가까이 대 공손함을 유지했다.


술자리 예절... 또 뭐가 있었지?


건배를 할 때는 내 잔이 윗분보다 올라가지 않게 하라고 했고, 술을 마실 때는 고개를 돌려 마시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이제 겨우 술을 따라드렸을 뿐이므로 이건 해당조차 되지 않는 얘기였다.


결국 혼자서는 답을 못 찾고 있는데, 전무가 이어 타박하듯 말했다.


어디서 버릇없게 술을 왼손으로 따라? 어?



처음 듣는 얘기였다. 술을 왼손으로 따르는 게 주도에 어긋난다는 걸.


(나는 왼손잡이는 아니다. 단지 당시 앉아있던 방향이 왼손으로 술을 들고 따르는 게 더 자연스러워서 그랬을 뿐이었다.)


서러웠다. 다른 건 몰라도 어른한테 예의 없단 소리는 안 듣고 컸던 나였다. 어디서 못 배운 티 내냐는 소리 역시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회사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누군가한테 혼난 경험이 다른 것도 아니고, 술을 왼손으로 따라서라니.


그 일이 있은 후 혹시나 또 비슷한 실수를 하게 될까 봐 주도에 대해 검색을 해 보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술은 꼭 오른손으로 따라야 한다는 얘기를 보지 못했다.




이제 캐나다에 사는 내게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남 얘기가 되었다. 잘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술을 억지로 마셔야 하는 일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원한다면 평생 한잔도 입에 대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얻었다.


오늘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한번 검색해 봤는데 오른손, 왼손 얘기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검색만으로 쉽게 찾을 수 없는 걸 보면, 올바른 주도냐 아니냐를 떠나서, 일단 통용되는 문화는 아니지 싶다. (혹시 브런치 독자님들 중에 아시는 분이 계시면 좀 알려주세요.)

 

심지어 <주도 마스터가 알려주는 올바른 주도 문화>라는 글에서는 남자분이 술병을 "왼손"으로 들고 술을 따른다.


하지만 설사 그게 주도에 어긋난다 하더라도 손녀뻘 되는 나한테 꼭 그렇게 소리를 질러야 했을까? 그냥 점잖게 "어허, 술은 오른손으로 따라야지." 정도로 알려줄 순 없었을까?


그날 나는 그렇게 모든 동기들 앞에서 술자리 예절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하아... 진짜 이 회사는 나에게 좋은 기억은 하나도 안 남겨준 것 같다.





굳이 꺼내보는 또 다른 안 좋은 기억: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가 내게 심부름값을 주지 않은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