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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Lee May 12. 2022

내가 서른이 넘어 발레를 시작한 이유


초등학교 2학년부터 4학년까지 발레 학원을 다녔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씩 가는 취미 발레였지만 당시 나는 꽤나 발레에 진심이었다. 분홍빛 타이즈에 분홍빛 레오타드, 그리고 분홍빛 슈즈까지 갖춰 입고 발레를 배우는 그 시간이 너무 좋았다.


일명 똥머리라고 하는 머리는 엄마가 집에 없을 땐 두 살 터울 언니가 해 주기도 했다. 언니가 머리를 해주는 날은 눈꼬리가 위로 바짝 올라갈 정도로 타이트했지만 대신 머리카락 한올 빠져나오는 법이 없이 탄탄하게 묶였다.


4학년 가을쯤 어느 날.


엄마가 발레학원 원장 선생님과 통화하는 걸 우연히 듣게 됐는데, 내용상 수강료에 대한 얘기 같았다. 대화 끝에 엄마가 말했다.


"아, 그럼 수업 한 번에 만원 꼴인 거네요."


한 번에 만원, 한 달에 8번 수업이었으니, 한 달에 8만 원 정도인 셈이었다. 당시 물가로 하면 적은 금액은 아니었으리라.




내가 다니던 학원은 동네에서 꽤 규모가 있는 큰 학원이라 매년 말이 되면 반 별로 작품을 준비해 공연장에서 공연을 올렸다. 물론 그 공연의 주인공은 솔리스트로 나오는 고등학생 전공반 언니들이었지만, 우리 주니어들도 예쁜 튜튜를 맞춰 입고 군무를 선보였다.


출처: Unsplash.com


엄마는 1년간 수고했다며 스튜디오까지 따로 예약해서 기념사진을 찍자고 하셨고, 공연의상이었던 튜튜를 입고 찍은 사진을 액자로 크게 만들어 내 방에 걸어주셨다.


그리고 다음날 엄마가 말했다.


"J야, 이제 발레는 그만 하자"

"왜에? 난 계속하고 싶은데?"


"처음에 엄마랑 약속했잖아. 발레는 그냥 취미로 하는 걸로. 그리고 이제 5학년이니까 공부도 해야 하고 엄마 생각엔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아."




나는 발레를 그만두기 싫었다. 


그런데    엄마가 원장님과 통화했던 내용이 떠올라  이상 떼를  수가 없었다. 우리 집은 아빠가 대기업을 다니시고 엄마는 주부셨던, 당시 기준으로 평범한 가정이었지만, 그럼에도 매달 8 원의 학원비가 부담이  수도 있다는 생각을  만큼은 내가 철이 들어 있었나 보다.


발레학원 방학이 끝났지만 나는 더 이상 학원에 가지 않았다. 발레학원 개강 첫날 오후, 당시 나랑 제일 친한 친구였던 B한테서 전화가 왔다. 참고로 B의 친언니는 나랑 같은 발레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J야, 우리 언니가 그러는데 너 중급반으로 승급했대!"

"진짜? 내가? 내가 중급반으로 올라갔다고?!!"

"응! 근데 너 진짜 이제 발레 안 할 거야?"


아... 내가 얼마나 고대했던 순간이던가. 내게 중급반이란 단순히 한 단계 승급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바로, 중급반부터는 토슈즈를 신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출처: Unsplash.com


나는 그 끝이 뭉툭하고 딱딱한 토슈즈가 너무 갖고 싶었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중고등학교 전공반 언니들이 토슈즈 끈을 매는 모습을 늘 동경하는 마음으로 바라봤었다. 언니들의 손끝과 발끝 하나하나가 그렇게 우아하고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나도 언젠가 중급반으로 올라가면 저 예쁜 토슈즈를 신어볼 수 있겠지?' 마음속으로 늘 꿈꿔왔었고, 중급반으로 올라갔다는 건 내가 늘 꿈만 꾸던 그 토슈즈를 직접 신게 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는 엄마한테 발레를 계속하고 싶다는 말을 다시 꺼내지는 못하고, 승급 소식을 들은 날 엄마 몰래 방에서 펑펑 우는 것으로 발레와 작별했다.




성인이 되고도 발레 생각이 종종 났다. 그런데 요가나 필라테스 같은 운동과 달리,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발레 기초반을 찾기가 어려웠고, 막상 기회가 있어도 이제와 다시 쫄쫄이 타이즈와 레오타드를 입을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발레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할 수 없을 만큼 사는 게 바빴다.


그러던 내가 서른을 훌쩍 넘기고서 다시 발레를 시작했다.


좋은 선생님을 만났고, 한 반에 4명 이상을 넘지 않는 소규모 그룹 레슨이라는 점이 맘에 들어 적은 비용이 아님에도 큰 맘먹고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이달 말이면 발레를 다시 시작한 지 꼬박 1년이 된다.


아직은 말랑말랑한 천슈즈를 신고 연습하고 있지만, 올해 안에는 토슈즈를 신어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적어도 이제는 엄마가 안 보내줘서 학원을 못 다니게 되는 일은 없을 테니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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