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나는 사춘기를 지나고 있었다.
굉장히 내성적인 성격이던 나는 당시, 어쩌다 어울리지도 않는 감투를 쓰고 학교 여러 행사에 대표로 참석하고 있었는데, 자꾸 여러 사람 앞에 나서야 하는 상황들이 너무 버겁게 느껴져 혼자 우는 날이 많던 때였다.
그런 나와 늘 지지고 볶는 엄마는 말할 것도 없고, 퇴근이 늦어 주중에는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한 아빠도 부쩍 어두워진 내 표정을 눈치채신 모양이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저 많은 사춘기 청소년들이 겪는 시간을 겪고 있을 뿐이었을 수도 있는데, 상대적으로 수더분한 언니와 비교되다 보니 나의 예민함이 유독 두드러져 보였고, 나는 그렇게 우리 집 "왕예민이"가 되어 있었다.
집 근처 일식 돈가스집에 외식을 하러 간 날이었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도 나는 내내 어두운 얼굴이었고, 끝내 식탁에 팔을 베고 얼굴을 파묻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힘듦"을 알아달라는 무언의 표시였던 것 같은데, 그런 내 모습이 아빠 눈에는 많이 불편하셨던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가족이 함께 나온 외식자리에 중2밖에 안된 내가, 마치 세상 고민 혼자 다 짊어지고 있는 것 같은 얼굴로 앉아있는 모습이 예뻐 보였을 리 없다. 하지만 나는 “힘들다, 도움이 필요하다” 성숙하게 말하는 법을 몰랐다. 내 나이 고작 15살, 아직 많이 어린 나이였다.
마침 옆 테이블에 네다섯 살 정도 된 아이 두 명과 함께 외식을 나온 가족이 있었다. 아빠는 내내 그쪽을 흘끔거리시다가 이내 한숨을 쉬듯 한 마디 하셨다.
"에효, 너네도 저렇게 귀여울 때가 있었는데...”
저때가 그립다...
그리고 그 말은 내게 “너는 더 이상 귀엽지 않아. 너는 더 이상 사랑스럽지 않아.”라고 들렸다.
그 일이 있은 후, 어느 날 꿈을 꿨다.
나는 놀이동산에 있었고, 저 앞에 아빠가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아빠아~!!” 하고 부르며 달려가 팔짱을 끼웠는데, 아빠가 그런 내 팔을 뿌리치는 꿈이었다. 꿈이 얼마나 생생했는지 울면서 잠에서 깼다.
그리고 그 뒤로도 몇 년간 같은 꿈을 몇 번이고 더 꾸었다. 배경은 늘 놀이동산이었고, 아빠는 늘 매몰차게 내 팔짱을 뿌리쳤다. 그리고 나는 매번 울며 깼다.
서른을 훌쩍 넘긴 나는 이제 그런 꿈을 꾸지 않는다.
아이들이 어릴 때 너무 귀여워, 그때가 그립다는 말이 어떤 뜻인지도 안다. 지금 사랑스럽지 않단 얘기가 아니란 걸 안다.
심지어 나도 (코로나로 아직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조카를 사진으로 볼 때면 조금 천천히 커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는데, 부모 마음은 오죽할까.
그럼에도 아이 앞에서는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감히 당부하고 싶다.
대신, “너는 엄마 아빠한테 찾아온 보물 같은 아이고, 그런 너를 평생 사랑한다”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아이에게 부모는 우주라는데, 그 우주가 나를 변함없이 따뜻하게 품어줄 거라는 믿음을 모든 아이들이 가졌으면 좋겠다.
사진출처: Unsplas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