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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Lee Jun 27. 2022

시험을 세달 앞두고 엄마가 암에 걸렸다 (하)

두 번째 이야기


*이전 포스팅과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이전 글을 먼저 보고 오시는 걸 추천합니다.




나는 다만 1주일이라도 휴가를 내고 한국에 가서 엄마 얼굴을 보고 오고 싶었다. 그런데 엄마가 원치 않았다.


당장 내가 온다고 상황이 달라질 것도 아니며, 너 오면 엄마가 오히려 더 신경 써야 하는 게 귀찮다며 나의 한국행을 극구 말리셨지만, 나는 안다. 행여나 내 공부에 방해가 될까 걱정이 돼서 오지 말라고 하셨다는 걸.


시간이 꽤 흐른 후 그때 얘기를 들은 친구 하나가 말했다.


"나라면 당장 한국 갔을 것 같아."


나라고 왜 그런 생각을 안 했겠는가. 이깟 시험이 뭐라고, 올해 못 보면 내년에 보면 되는 일이었다. 너 오는 거 도움 하나 안 된다고 말려도, 막상 가면 반가워하지 않을까 싶어, 혼자 비행기표를 알아보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의 항암이 이미 몇 차례 진행된 후 엄마랑 통화를 하던 날이었다. 목소리에 기운이 하나도 없어 엄마는 마치 속삭이는 것 같이 말했다.


"J야... 공부 열심히 해서... 시험 꼬옥 한 번에 붙어줘. 엄마 걱정하지 말고... 알았지?"


그리고 나는 그 전화를 끊고 생각했다. 내가 혹시 이번 시험에 합격을 못 한다면 엄마는 얼마나 미안해할까. 내가 공부를 덜 해서 떨어진 건데, 엄마는 엄마 때문이라고 생각하겠지. ‘나 아픈 거 신경 쓰느라 우리 딸 공부 망쳤구나’ 자책하겠지.


나는 엄마를 위해서라도 꼭 한 번에 붙어야 했다. 그리고 그게 진짜 엄마가 원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자, 지금 당장 한국을 가는 대신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나중에 합격증을 들고 가는 게 맞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나의 이중인격 생활이 시작되었다.


회사 사람들한테는 일부러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안쓰러움이 가득 묻어나는 얼굴을 하고 와서 "J, 괜찮아?"하고 한 마디라도 묻는 순간 그 자리에서 무너져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번 무너지면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인가 나는 회사에 있을 때는 정말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일을 했다. 하던 대로 일을 했고, 가끔은 동료랑 농담도 주고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신기할 정도로…


그리고 퇴근 후 차로 돌아와 시동을 거는 순간 눈물이 터졌다. 그렇게 매일을 울면서 퇴근했다. ‘차’라는 공간이 주는 안정감을 그때 처음 알았다. 집 밖에 있지만, 꼭 집 안에 있는 것 같이,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나만의 공간. 그 따뜻함 때문인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일을 하고, 퇴근길에는 눈물이 범벅인 상태로 집으로 돌아오는 날의 반복이었다.



집에 와서는 남편이랑 아무렇지도 않게 저녁 먹고 얘기하다 또 갑자기 눈물이 터지면 참지 않고 실컷 울었다. 공부를 하다가도 종종 멍 때리는 일이 잦았고, 그러다 또 감정이 올라오면 그 자리에서 울었다.


그렇게 멀쩡했다, 펑펑 울었다 하는 두 얼굴로 몇 달을 지냈다. 남편은 내 그런 감정 기복을 다 그대로 받아주었고, 가끔은 함께 울어 주었다.




엄마의 항암치료가 진행되는 동안 아빠는 이것저것 필요한 정보를 찾아보셨고, 나도 나름대로 유튜브, 블로그 등을 찾아보며 공부했다. 의사 선생님이 알아서 다 해주시겠지만, 내가 찾은 정보를 아빠와 틈틈이 공유하는 게 내가 엄마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런데 나중에야 알았다. 내가 틈틈이 보낸 정보 대부분을 아빠는 이미 알고 계셨지만, 그럼에도 내가 꾸준히 아빠와 연락하며 엄마의 항암치료 과정과 컨디션을 체크한 건, 아빠로 하여금 '혼자가 아니다'는 생각에 많은 힘이 되었다는 걸. 아빠는 엄마 옆에 아빠 혼자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느끼게 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


시간이 흘러 9월이 되었고, 시험을 1주일 앞두고는 매일 하던 카톡을 잠시 쉬었다. 이날을 위해 몇 년을 달려왔기에, 최상의 컨디션을 만드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렇게 나는 시험을 쳤고, 11월 말, 합격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다음 달인 12월, 엄마는 8차에 걸친 항암을 꿋꿋이 견뎌 주고, 의사 선생님의 "이제 깨끗합니다"라는 눈물 나게 감사한 메시지와 함께 퇴원하였다.


울 엄마 만세! ❤







사진 출처: Unsplas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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