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영어학원에서 학생 코디네이터로 일을 할 때였다. 월급날 옆에 있던 동료 한 명이 말했다.
"어휴, 돈 다 떨어졌는데 오늘 이 돈 아니었음 큰일 날 뻔했네."
그때는 그저 그녀가 월급관리를 아주 못하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 뒤로 몇 년을 이곳에 살면서 캐나다인의 상당수가 저축을 안 하거나 못하고, 대부분 매달 들어오는 월급에 의지해서 산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혹시 월급이 밀리거나 직장을 잃게 되면 당장 큰 문제가 생길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영어 표현 중에 "live paycheque to paycheque"이라는 말이 있다. "다달이 벌어먹고 살다"라는 뜻인데, 2022년 9월 30일 자 기사에 실린 BDO 조사에 따르면 54%의 캐나다인이 이 “다달이 벌어먹고 사는” 그룹에 속한다고 한다. (2021년 대비 3% 증가)
또한 45세에서 64세 사이의 캐나다인 중 32%가 노후자금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다고 답했다.
캐나다가 이렇게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코로나와 물가상승으로 인해 더 많은 사람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게 이곳의 현실이다.
그런데 미국은 상황이 더 심각한 듯하다.
CNBC 뉴스에 따르면, 무려 63%의 미국인이 다달이 벌어먹고 살고 있다고 답했으며, 8.2%라는 기록적인 물가상승의 영향 때문인지 직장인 중 3분의 2가 2021년에 비해 경제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고 답했다.
또 다른 조사를 살펴보자.
미국의 금융정보 제공 업체 Bankrate에서 1,000명의 성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무려 56%의 응답자가 비상시 쓸 수 있는 1,000불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고 대답했다. (조사기간: 2022년 1월, 신뢰도 95%, 표본오차 3.41%)
위의 표에서처럼 응답자의 44%만이 이 돈을 저축된 돈에서 지출할 수 있다고 했고, 20%는 우선 신용카드로 지불한다고 했으며, 가족이나 친구한테 빌리거나 대출을 받아야 한다는 사람도 14%나 됐다. 더 놀라운 것은 44%라는 이 수치가 지난 8년 중 제일 높은 기록이었다는 점이다.
미국은 특히 의료보험 체제로 늘 말이 많은 곳인데, 당장 누군가가 아파서 병원엘 가야 하거나, 차를 급하게 수리해야 하는 등의 비상 상황에도 단 돈 백만 원이 없어 난감한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뜻이다.
진짜 아끼고 아껴 써도 생활비가 빠듯해 저축은 꿈도 못 꾸는 사람들도 물론 있다.
하지만 여기 사람들의 씀씀이가 대체로 그렇다. 일단 버는 대로 쓰고, 일단 신용카드로 긁고, 일단 휴가 다녀와서, 그다음 돈 벌어서 갚자는 마인드.
그런데 정작 그걸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으니, 내 입장에선 안타까울 수밖에.
이제 두 돌을 막 지난 내 조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는 그 아이를 위한 여벌옷이 항상 마련되어 있다. 혹시 밥을 먹다 흘리거나, 야외활동을 나갔다가 옷을 버리는 날에는 바로 갈아입힐 수 있는 옷.
그리고 그런 날은 키즈노트에 선생님의 메모가 한 줄 추가된다.
"어머니, 땡땡이 오늘 옷에 뭐가 많이 묻어서 옷 갈아입혔어요. 여벌옷 하나 더 보내 주세요."
비상금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필요할 일이 없으면 더 좋겠지만, 혹시 그런 일이 생겨도 당황할 필요 없이 바로 갈아입을 수 있는 여벌옷 같은 것. 그리고 그 옷이 쓰이고 나면 가능한 한 바로 다시 채워 놔야 하는 것.
예쁘거나 고급지지 않더라도, 비상시 필요한 여벌옷 한 두벌 정도는 누구나 마련이 되어 있는 사회가 되길 소망해 본다.
사진 출처: unsplas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