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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리 Mar 17. 2020

손으로 말하다보면

눈치코치로 때려 맞출 수 있다.

'고구마라떼 아이스 한 잔 주세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여자 손님 한 명이 손바닥만 한 수첩에 글자를 적어 보여줬다. 목이 아프신가?


“사이즈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 생각 없이 되묻자 손님이 내 얼굴을 쳐다보다가 카운터 앞에 놓인 일회용 컵 큰 사이즈를 가리킨다.


“네 라지 사이즈로 드릴까요?” 되묻자 고개를 끄덕끄덕. 그러더니 한 손을 펴서 손등을 위로 두고 가슴께에서 위아래도 흔들어 보이며 입모양으로만 말했다.


‘덜 달게 해주세요.’

“아 달게 해 드릴까요?” 내 입모양을 집중해서 바라보는 손님에게 친절한 목소리로 다시 물어봤다.

‘덜, 덜,’ 바람 뱉어내는 소리와 손동작으로 다시 설명하는 손님.



그제야 아차 싶었다.

나는 들리지 않는 않는 사람에게 계속해서 되묻는 불친절한 알바생이었다. 카페에 진동벨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평소보다 고구마도 많이 넣고 연유도 더 넣어서 달콤하게 만들었다. 진동벨을 울리자 손님이 고구마 라떼를 찾아갔다. 고개를 꾸벅, 맛있게 드시라는 인사는 참았다. 5분쯤 지났을까, 손님은 음료를 카운터에 올려두고 가게를 나갔다. 딱 두 모금만 마시고. 아, 달게가 아니라 덜 달게였구나. 글로 써서 자세히 물어볼걸. ‘두 유 스피크 잉글리시? 라고 묻는 손님에게는 ‘오브 코올쓰!’ 라고 답하면서, 왜 수화를 배울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을까.



수화가 아니라 수어였다.

수어가 나에게 낯선 언어였듯 농인에게는 한국어가 제2외국어였다. 매일 아침 10시 충정로역 7번 출구 앞 수어 전문교육원. 토익 수업을 듣는 마음으로 두 시간씩 수어를 배우기로 했다. 첫 수업부터 5분 지각했다. 슬그머니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조용한 교실에서는 표정으로 손으로 수업이 한창이었다. 빈자리에 앉아 눈치껏 동작을 따라 했다.


한 손 엄지만 펴면 그것은 사람이거나 남자를 뜻한다. 엄지 뒷쪽 등을 다른 손으로 톡톡 앞으로 밀면 ‘도와주다.’ 엄지 아래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리면 ‘칭찬하다.’ 엄지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대면 ‘재촉하다.’를 뜻한다. 영어는 단어를 모르면 전혀 안 들리지만 수어는 자세히만 들여다보면 눈치코치로 때려 맞출 수 있다.


중요한 건 표정이었다. 음성언어를 사용하는 청인은 목소리 하나만 쓰지만 수어를 쓰는 농인은 음성만 빼고 다 쓴다. 도와줄 때는 진심이 담긴 표정을 짓고, 도와주는 척할 때는 고개는 삐딱하게 돌리고 표정은 삐죽삐죽하다가 들키면 아닌 척 다시 엄지 등을 밀며 웃어준다.

청인의 언어는 싫어도 웃거나 좋아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비언어적 거짓말을 쓰는데, 농인의 언어는 아니다. 섬세하게 관찰해서 정직하게 표현한다. 배운 것을 연습해 보는데 아무래도 표정이 손을 못 따라간다. 농인이 보면 말을 하다가 마는 사람 같겠지. 이러다 청인들은 표정이 속마음과 반대로 보이도록 진화하거나 영영 굳어 퇴화할지도 모르겠다.



수어로 나누는 대화는 연극을 보는  같기도 하고, 연극 대본을 읽는  같기도 하다. 수어를 쓰는 동안에는 서로를 온전히 바라본다.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동작을 하는지 놓치지 않고 주고받는 밀도 있는 의사소통.


카페에서 진동벨을 받을 때마다 그날이 떠오른다. 달지 않은 고구마 라떼가 먹고 싶었던 농인 손님. 출근시간 서울역에서 지하철을  때면 휠체어로 출근이 하고 싶었을뿐인 직장인, 티켓팅을  때면 좋아하는 연예인의 공연을 좋아하는만큼 가까이서   없는 휠체어석 팬들이 보인다. 존재했지만 몰랐던 사람들. 손으로 말하다 보면   보고,  듣고, 응답할  있지 않을까.



TIP)

청인끼리 수다를 떨면 목이 아프지만

농인과 수어로 수다 떨다보면 '웨이트' 효과가 있다는 사실!


뻔뻔한 질문 #5. 제3외국어
배우고 싶은 언어가 있나요?
누구의 언어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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