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흐름 일기
1.
팀 이동 3달 차,
업무 밀도가 정상화되고 (한 건에만 집중하는 수준)
정시 퇴근이 당연해지고 주말을 마음대로 쓰면서
장을 보고 요리를 해 먹을 힘이 생겼다.
*토마토
왼쪽은 이태원 케밥집에서 배달시켜 먹고 상쾌했던
터키식 토마토샐러드 ‘초반 살라타’ (두 번째 담가먹음)
*오이
옆은 점심에 가로수길 중국가정식집에서 먹고 신선했던
중국식 오이탕탕이 ‘파이황과’
*계란
오른쪽은 트위터 광고에 뜬 다이어트식 레시피
순두부팽이버섯계란찜.
충동적으로 배달시켜 먹던 습관을 찬찬히 벗어나보려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알아가는 방법으로.
2.
퇴근하고 롯데마트에서 위에 재료들을 한 짐 장 보고 나오는데, 택시승강장에 있던 어떤 할머니가 무릎을 절룩이며 다가와서 말 좀 묻자며 잡았다.
짧게 깎은 머리에 마스크를 꼈고 시원한 재질 패턴 셔츠 차림에 가방을 앞으로 메고 있었는데, 허리가 굽은 데다가 마스크 때문에 말소리가 잘 안 들렸다.
자세히 들어보니 마트에서 물건을 고르는 걸 좀 도와줄 수 있냐며. 평소에 먹는 우유와 요구르트가 있다며.
난 퇴근 백팩에 3kg짜리 얼음까지 사서 손이 무거웠고 눈앞에 신호등만 건너면 우리 집이고, 잠시 고민하다가 그럼 기다리시라고 짐을 두고 오겠다고 얘기하고 집으로 뻗어있는 횡단보도를 건넜다. 골라만 달라는 걸까. 사달라는 걸까. 그건 끼니로 드시는 것들일까. 그 할머니 일해서 돈을 벌 수 없는 몸이었다. 난 기분 내키면 스크롤 몇 번으로 몇 만 원씩 며칠이고 배달을 시켜 먹는데. 오피스텔 건물을 올려다보며 등 뒤에 할머니를 의식했다. 내가 안 돌아오면 언제까지고 앉아있을까?
3.
기꺼이 삥을 뜯겨드릴까. 가방을 벗고 얼음만 냉동실에 넣었다. 서랍에 대충 던져둔 봉투에서 현금 2만 원을 챙겼다. (얼마 전 이전 팀에서 포상금으로 나눠 받은 돈에서 친구 모친상 부의금 빼고 조금 남아있었다.)
멀리 신호 건너 마트 앞 택시승강장에 그 할머니가 앉아있었다. 다가가 물었다.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우유와 요구르트 먹는 게 있다며 네모를 크게 몇 번 그려 보인다. 일어나 같이 마트 쪽으로 향하는데 아무래도 할머니 걸음이 너무 불편하다. 에스컬레이터가 있다지만 2층이나 가야 하는데. 괜찮으시면 여기 계시면 제가 사 올게요. 고르는 걸 도와드려요? 하니, 함께 가겠다고.
굽은 등 위로 튀어나온 마른 목뼈를 쳐다보는데 대뜸 내 얼굴을 보더니, “예수님 믿어요?” 그러기에 전도하는 줄 알고, 잠시 머뭇 “아뇨.” 답하자,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같이 가주냐기에, “아 그럼 믿어요” 그랬다. 역시 그러냐며 자기가 믿는 사적인 예수님 얘기를 하는데 좀 서글펐다. 걸으실 수 있겠냐고 말씀해 주시면 사다 드리겠다 재차 물으니, 저기 엘리베이터가 있다며. 평소 탈 생각도 안 했던 구석을 가리키기에 같이 타고 매장으로 올라갔다. 손을 보호하려고 낀다며 두껍지 않은 빨간 털장갑을 들어 보이기에, 저녁은 드셨어요, 뭘 고르실 거예요? 했더니, 우유랑 요구르트랑… 머뭇 빵.
4.
할머니 가는 대로 따라가는 듯 우유 요구르트 냉장고 있는 쪽으로 안내하듯 따로 또 같이 천천히 걸어갔다. “끄는 거 하면 좋은데” 카트를 보기에, “괜찮아요 제가 들어드릴게요.” 냉장고 문을 열고 요플레 덤이 붙은 큰 박스 하나랑, 조금 더 걸어서 서울우유 천미리 한 팩. 빵 코너로 걸어가며 “빵 말고 더 고르실 게 있을까요?” 했더니, 빵을 둘러보다 동그란 패스츄리가 팩에 여러 개 든 한 봉을 고르기에 받아 안아 들며, 이거 많이 달콤한데 안 단 거도 하시겠어요 했더니, 일단 이거면 먹지 무겁잖아요 하기에, 빵 말고 다른 거 더 고르실래요 했더니, 걸음을 돌려 아까 냉장고 골목으로 나가다 갑자기 걸음을 멈춰 눈을 질끈 감기에, 어지러우신가 “괜찮으세요” 했더니. “생각이 안 나. 갑자기 고르려니 모르겠네” 머리를 짚고 몇 번이고 걷다 멈추기를 반복하시기에, 빵을 더 고르시면 어때요 했더니, 걸음을 옮긴다.
한참 빵코너 앞에서도 어지러운 듯 서 계시기에 “이게 안 달고 부드러워요 드셔보셨어요?” 카스텔라 세 개가 든 봉지를 골라 건네니 거기 적힌 글씨를 읽는다. “먹어봤지 클래식 에그” 계산하면 될까요? 걸음을 옮기려니. 나가는 곳에서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기에, 그러시라 셀프 계산대로 갔다. 초록색 재활용 가방을 하나 골라 요플레박스, 우유, 빵봉지 무거운 순으로 담으며 생각했다. 내가 이걸 사서 혼자 가버리면 어쩌려고. 할머니는 이 마트 앞에서 몇 사람을 붙잡아 말을 걸었을까.
5.
왔던 길로 같이 되돌아가며 할머니가 예수님 얘기를 몇 마디 더 했던 것도 같은데. 내 얼굴을 보고 이름이 뭐냐고 궁금해하기에, 비밀이에요. 하며 아까 타고 올라온 엘리베이터로 갔다. 내가 사정이 그렇게 됐다며 얘기하기에, 이제 어디로 가세요 물으니, 집으로 간다기에 어떻게 가세요 물으니, 택시로 무릎이 안 좋아 현금 내고 타고 다닌다는 얘기를 꺼내기에. 한참 대꾸 않다가. 혹시 주민센터 같은 곳 가보시면 좋은데요 했더니, “가봤지 가봤는데 내 사정이 어렵게 됐어요.”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댁이 어디세요 했더니, 종로 6가 하기에 “주소 아세요?” 했더니 “주소를 자꾸 묻는데 내 사정이 그래요.” 댁에서 모시러 올 분이 계세요 물으니, 사정이 그래요.
밖으로 나가니 이제 깜깜했다. 멀리 택시 빈차가 보였다. 다시 처음 만났던 택시승강장 의자로 가 짐을 내려드리니 내게도 앉으라는 할머니에게, 지금 택시 타시냐 물으니, 현금을 주냐고 하기에 “택시 잡아드리면 주소 말씀하실 수 있으세요?” 물으니 그렇다기에, 빈차 뒷좌석을 열어 기사님에게 종로 6가 요금 얼마나 나오냐 물으니, 기사님이 넉살 좋게 “많이 나오겠어요 가까운데?” “그렇죠?” 마트에서 산 초록 가방을 실으며 할머니에게 타시라고 하자, 현금 이야기를 하기에, “주소 말씀하실 수 있죠?” 하니 몸을 싣는다. 지갑에서 만 원을 꺼내 할머니에게 드리니, 기사님이 나한테 “안 타시고?” 묻기에 “할머님만요” 문을 닫으려는데 할머니가 나에게 이름이 뭐냐고 묻기에. 그냥 이씨예요. 기사님 잘 부탁드립니다. 택시 문을 닫고 집으로 가는 신호등을 다시 건넜다. 할머니는 다시 서울역 롯데마트 앞 택시승강장에서 내 이름을 찾으려는 걸까.
6.
마트에서 장 본 재료를 다시 정리했다. 티빙에서 어제 재밌게 봤던, 악귀에 씐 남자주인공이 1인 2역을 하면서 이제 막 재밌어지기 시작한 <견우와 선녀> 라이브를 틀었다. 무당인 여자주인공이 첫사랑이라는 이유만으로 목숨 걸고 그를 지키려는 모습을 보면서 토마토랑 오이를 썰었다. 오랜만에 집에서 몸에 편안한 재료로 만드는 저녁 한 끼.
곧 민생지원금 15만 원이 나올 텐데. 주민센터 얘기를 제대로 할걸. 예수님, 저녁 한 끼가 생겼으니 된 건가요. 일회용밖에 안 되는 개인의 호의에 기대야 하는 게, 이게 맞는 건가요 예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