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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리 Mar 13. 2022

망친 와인

와인 망치는 법을 배웠다.

직사광선을 쏴서 열 받게 하기. 흔들리는 곳에 두고 속 뒤집어 놓기. 긴 시간 세워둬서 쪼그라든 코르크 마개 틈으로 바깥공기 잔뜩 집어넣기. 소믈리에 선생님은 잘 망친 와인 한 병을 가져와서 학생들에게 한 잔씩 따라줬다. 2012년에 태어난 와인은 열에 익어 버리고 진동에 아로마(향)가 뒤엉켜버리고 산화되어 침전물이 생겨 버렸다. 와인이 아니라 보약 같은 빛깔로.


걱정 마세요. 먹어도 안 죽어요.

숙성 방법은 잘못됐지만 이 맛을 생각보다 괜찮게 느끼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실제로 수강생 중 몇 명은 와인잔 바닥이 보일 때까지 천천히 음미하기도 했다. 이런 것도 와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나는 두 모금만 마시고 잔 안을 들여다봤다. 적당한 온도와 조건을 만나지 못해 시간을 정통으로 견딘 흔적이 보였다.


꽃은 일찍 피고 열매는 늦게 맺는 네비올로.

이탈리아어로 안개(Nebbia)에서 이름을 따온 적포도 품종이다. 다른 포도들은 진작에 와인이 됐고, 가을이 되어서야 피에몬테 언덕의 자욱한 안개와 함께 수확된다. 늦게 와인이 돼서인지 오래 숙성해서 마신다. 오늘 마실 네비올로는 지금 따기엔 조금 이른 빈티지라고 했다. 빨간 과일향과 연한 가죽 냄새가 났다. 잔에 힘을 주는 대로 흔들리는 가벼운 농도였다. 호로록 한 모금 마셔보니 짱짱하고 단단한 산미가 입안을 조인다. 이게 어린 맛인 건가. 빈티지 차트에 안내된 것처럼 좀 더 숙성해서 적당한 시기에 맞춰 땄다면 지금보다 성숙한 맛이었을까.



한 살에 사뒀다가 스무 살에 마시는 와인.

오래전부터 상상했다. 만나본적도 없는 사람에게 줄 선물을. 언젠가 가족을 만든다면, 아이가 태어난 해 빈티지의 와인을 사서 아이가 성년이 되는 날 함께 마실 거다. 키워보지도 않았지만 잘 커줘서 고맙다는 감동적인 멘트와 함께. 근데 선생님, 와인이 20년이나 버텨줄 수 있을까요? 처음에 마신 망친 와인이 생각났다. 잘 만든 네비올로 와인은 병에서 30년도 숙성할 수 있다고 했다. 아까 마신 건 망친 와인을 일부러 찾아온 거라며. '역시 네비올로가 좋겠군.' 상상 속 아이와 흐뭇하게 와인잔을 부딪히는데, 선생님이 그런다. 근데 그 결점이 매력이 되기도 하잖아요?


시간이 약이라는 말.

시간이 흐르면 힘든 일도 무뎌질 거라는 뻔한 위로는, 힘든 시간의 한복판에 있는 사람에겐 반갑지 않은 말이다. 그럴 땐 조용히 술이나 한 잔 사주는 게 더 위로가 된다. 이런 술은 약주다. 잊고 싶은 시간은 잘라내주고, 좋은 시간은 확대해서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술은 시간을 견디고 만들어져서 시간을 견디게 해 준다. 문득 궁금해졌다. 나와 같은 1992년 빈티지에 태어난 친구들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각자의 폭풍 속에서 단맛 쓴맛 신맛 온갖맛을 겪으며, 흉내 낼 수 없는 향과 맛과 질감을 만들어가고 있겠지.


네비올로 100% - 지디 바이라, 바롤로 알베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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