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먼저 간 당신 딸 산소에서 풀을 뽑는다. 지난달에는 역시 먼저 간 아들 산소가 보기 흉하다며 손수 사초를 하였다. 딸은 여수 시립공원묘지, 아들은 순천 시립공원묘지에 묻혀 있다.
소위 보릿고개라는 가난한 시절이 있었다. 시기적으로 농사 생산성이 없는 5, 6월이면 보릿고개가 찾아와 굶기를 반복하는 집이 허다하였다. 이 시기를 미끼로 좀 있이 사는 사람들은 없이 사는 사람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기도 하였다. 이때 쌀 한 됫박 빌려주면서 모내기나 가을 무렵 몇날 며칠을 부려먹는 것이다. 지금이야 대부분 기계 농사지만 당시는 허리가 부러지도록 일해야 하는 막노동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발걸음 떼기도 힘든 무논에서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한 채 모심기를 하는 놉들에게 주인은 막걸리를 먹였다. 놉들은 막걸리 기운으로 버텼다.
조팝나무, 싸리나무, 이팝나무의 흐드러진 하얀 꽃이 더욱 굶주린 배를 움켜쥐게 하였던 보릿고개 시절, 온종일 노예처럼 일해 키운 자식들 가운데 어머니는 장남과 둘째 딸을 거푸 잃었다.
어머니가 술잔을 드시다가 뜬금없는 꿈 이야기를 꺼내신다.
나흘 전 밤 내가 죽는 꿈을 꾸었단다. 그래서 나흘 동안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단다. 꿈속에서 내가 살아나서 십년감수하였지만 살아난 내가 시커멓고 비쩍 마른 모습이어서 그 악몽의 여운이 길었던 모양이다.
“꿈에서 제가 죽었으니 제가 오래 살겠네요.”라며 실없는 말을 꺼내놓고 보니‘나흘 동안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는 당신 말이 가슴을 쿵 쳤다.
아무리 꿈이었지만 얼마나 황망히 넋을 놓았을까. 또 얼마나 기진하였을까. 당신에게는 그런 악몽도 없었을 것이다. 자식 둘을 거푸 묻은 가슴인데 또 내가 죽은 꿈을 꾸었으니 나흘 동안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다는 당신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다섯 살 딸, 마흔 살 남편, 사십 대 삼십 대의 아들과 딸을 잃으며 노모는 죽음의 트라우마를 빙의처럼 안게 되었다. 그래서 당신 몸이 다소 아프기만 해도 금세 흙빛이 되면서 기진해진다.